9화 나 임신했어
이별이는 고개를 들어 타워의 유리벽을 바라보았다.
안쪽이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차디찬 눈빛이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제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웠으니, 주연준이 그녀를 얼마나 혐오할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지도 모른다.
임남철이 대동한 보안팀이 인파를 헤치고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길바닥에 드러누운 채 소리를 지르는 이윤복을 마주했다.
그녀는 숨 막히는 피로감을 느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이윤복은 그녀를 보자마자 옷의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섰다.
"잘 왔다! 주연준 불러와! 이혼했으면 당연히 재산을 나눠야지, 그 얘기 좀 하자고!"
"이미 말했잖아. 그 사람 돈과 나는 아무 상관없어."
그 말에, 그는 목소리를 한껏 높이며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되냐?! 너는 3년 동안 공짜로 잤니? 당연히 돈도 받아야지! 밖에서 여자들이랑 놀아도 돈은 주면서, 네가 헛수고만 했다고?! 어이가 없네!"
이별이는 입을 열었지만, 더 이상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임남철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신고하세요."
임남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서자, 이윤복은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야! 그냥 가려고? 내가 이러는 게 누구 때문인데? 받은 돈에서 내가 조금만 가져가면 되는 거잖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러는 게 말이 돼?"
이별이는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지, 나도 잘 알아. 소란 피우고 싶으면 실컷해. 어차피 경찰서에 끌려갈 테고, 난 오히려 며칠은 조용히 지낼 수 있겠네. 그리고, 나는 보석금 내서 빼내줄 생각이 없어. 양이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까 편히 지내."
순간, 이윤복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짝!
그녀의 머리가 한쪽으로 휙 돌았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네 입에서 그딴 말이 나와? 내가 너랑 이양이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지금 좀 돈 좀 번다고 이제 나까지 버리겠다고?!"
이별이는 뺨을 감싼 채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녀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주변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녀는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이윤복은 오랜 시간 동안 난동을 피웠음에도 주연준을 끌어내지 못했다.
겨우 이별이가 왔는데, 그녀마저 가버렸다.
게다가 경찰까지 부른다고 하니, 이대로 잡혀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안팀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 사장한테 전해! 며칠 안에 다시 올 거라고!"
그렇게 그가 떠나자,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
임남철은 건물 안으로 향했고, 창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주 회장님,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주연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별이는?"
"이미 떠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떠났다고?"
"네, 그리고..."
임남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연준이 냉정하게 지시했다.
"오후 회의, 내일로 미뤄."
"알겠습니다."
주연준은 휴대폰을 켜고, 표정 하나 없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3시, 법원.]
그리고, 10분 후 답장이 도착했다.
[알겠어요.]
이별이는 길가의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얼굴을 파묻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녀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그녀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눈가를 대충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법원 앞에서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서자마자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병원이었다.
이별이는 머리를 감싸 쥐며 휴대폰을 찾았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시간은 오후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망했다.
그녀는 급히 주연준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
그 순간, 침대 옆 커튼이 걷혔다.
간호사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깨어나셨네요. 이미 검사를 마쳤어요. 저혈당이 있으시네요. 아침도 거르셨죠?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앞으로는 건강 관리 잘하셔야 해요. 잠시 쉬었다가 퇴원하시면 됩니다."
이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임신하셨어요.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심하세요. 특히 첫 3개월 동안은 각별히 조심해야 해요. 가능하면 남편분과 함께 다시 내원하셔서 정밀 검진을 받으세요."
그렇게 말한 후, 간호사는 그녀를 남겨두고 나갔다.
이별이는 간호사의 첫 마디를 듣자마자, 병상 위에서 얼어붙었다.
그 충격은, 마치 그녀가 대회에서 우승한 날, 이윤복이 2억 원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와 같았다.
마치 눈앞에 빛이 보였다가,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누군가 문 앞에 단단한 벽을 쌓아놓은 듯했다.
이별이는 이불을 들춰내고 곧장 산부인과로 향했다. 더 이상 주연준에게 해명할 생각조차 없었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신 40일째입니다. 태아는 건강한 상태예요. 하지만 예전에 유산을 하셨고, 당시 출혈이 심했는데 사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네요.
이번에 임신하신 건 정말 쉽지 않았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거나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몸조리 잘 하셔야 해요."
이별이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수술을 받을 수 있나요?"
의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가능하긴 하지만,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몸 상태로 유산을 하면 다음 임신이 어려울 수 있어요."
이별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시는 임신할 수 없다는 건가요?"
"꼭 그렇진 않지만, 많이 힘들어질 겁니다.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겠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일단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지금 몸이 너무 허약합니다. 만약 수술을 결정하신다면, 최소 2주 후에 진행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병원을 나서는 길, 이별이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사실을 주연준에게 알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그녀가 이혼을 미끼로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임신 소식을 전한다면, 그의 의심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이 아이를 절대 반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는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피임약이 100% 피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이걸 대체 누구한테 따져야 하는 건데?
밤늦게 배두연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켜자,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이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두꺼운 담요를 몸에 둘러싼 채 마치 명상을 하듯, 모든 감정을 차단한 것처럼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배두연은 그녀 옆에 앉으며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지금 뭐 해? 명상이라도 하는 거야?"
그제야 이별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임신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