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것도 남자라고!
이별이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TV나 계속 봐."
1층으로 내려온 이별이는 약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곧장 옆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배두연이 부탁한 것들을 하나씩 장바구니에 담고 나서, 문득 진열대 앞에서 멈춰 섰다.
여러 종류의 생리대를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이 두 달째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3년 전 유산한 이후로 생리 주기가 늘 불규칙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종종 두세 달에 한 번씩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몇 개 더 챙겼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서려던 순간, 입구 쪽에서 다가오던 여자가 그녀의 어깨를 들이받았다.
그 충격에 이별이가 들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여자는 옷을 털어내며 눈살을 찌푸리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앞도 안 보고 다니니?"
이별이는 차갑게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제대로 걷는 법을 못 배웠나 보네요."
그녀를 마주한 사람은 주안희였다.
주안희는 여전히 거만하고 도발적인 태도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너구나! 여기서 뭐 하는거야? 설마 사촌 오빠 없는 틈을 타서 딴 남자나 만나러 나온 거야?"
이별이는 그녀를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진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말했다.
"주안희, 이미 외국으로 떠났으면 그냥 거기서 사는 게 어땠을까 해요. 아직 모를 수도 있지만, 난 한 번 받은 건 반드시 되갚는 성격이거든요."
그 말에 주안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이별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조언 하나 해줄게요. 앞으로 절대 임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혹시라도 애를 가지게 되면, 난 언제든지 복수할 기회를 가지게 되니까. 그러니까 조심해요."
이별이는 천천히 그녀를 훑어보았다.
지금 당장 임신할 일은 없겠지만, 그녀는 이미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주안희는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미쳤어?! 네가 임신했는지 안 했는지는 너만 아는 거지, 내가 실수로 널 밀었다고 그걸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고?"
그러더니 더욱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감히 날 건드리려고? 주씨 가문이 널 가만 둘 것 같아?! 그리고... 그리고 내 사촌 오빠도 곧 널 버리고 이혼할 거야! 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이별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한번 해보지 뭐. 어차피 내가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미친 년!"
주안희는 악을 쓰듯 소리친 후, 급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에는 분노보다는 오히려 두려움과 초조함이 묻어나 있었다.
슈퍼마켓을 나선 주안희는 길가에 세워둔 레인지로버의 문을 열며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
"물 사러 간 거 아니었어?"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현진 오빠,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임신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우리 사촌 오빠한테 억지로 결혼하자고 한 여자. 방금 마트에서 마주쳤어. 진짜 생각만 해도 역겨워."
이현진은 짧게 대꾸했다.
"물 안 살 거면 가자."
"오빠, 나 말하고 있잖아요!"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현진의 시선이 창밖에 멈췄다.
주안희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가 보기엔 특별한 게 없었다.
"뭐야? 뭘 그렇게 봐요?"
그녀가 묻자, 이현진은 갑자기 차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오빠?!"
놀란 주안희도 급히 따라 나가, 사람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는 그를 붙잡았다.
"현진 오빠, 왜 그래요?"
그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착각이었나 봐."
방금 스쳐 지나간 그 뒷모습이,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럼 우리 가요."
주안희가 그의 팔을 끌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안희야, 내가 택시 불러줄게. 할 일이 좀 있어서 집까지 못 바래다줄 것 같아."
"근데 오빠, 오늘 나한테 분명히 데려다주기로 약속했잖아요"
이현진은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휴대폰을 꺼내 택시를 불렀다.
"차량 번호 문자로 보냈어. 나 먼저 갈게."
그리고는 주안희의 부름을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집에 돌아온 이별이는 산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소파 위에서 기운 없이 늘어져 있는 배두연에게 따뜻한 꿀물 한 잔을 건넸다.
배두연은 잔을 받아들면서도 흥분한 듯 눈썹을 들썩이며 휴대폰을 흔들었다.
"너, 방금 누가 나한테 연락했는지 맞혀 봐!"
"...괴도 키드? 아니면 짱구?"
"야, 진지하게 좀 맞혀 봐!"
배두연은 휴대폰 화면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거기에는 딱 두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난 이현진이야.]
[너 혹시 이별이 소식 알아?]
이별이는 그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면이 서서히 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배두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현진이 한국에 돌아와서 너를 찾고 있어. 누가 내 연락처를 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네가 지금 나랑 같이 지낸다고 말해도 돼?"
이별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말하지 마."
배두연은 그녀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기에,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한숨을 쉬며 이현진에게 애매하게 답을 보냈다.
"오래전부터 연락이 끊겨서 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소식 들리는 대로 바로 알려줄게."
이현진은 그녀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짧게 ‘고마워’ 라고 답한 뒤,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이별이는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해가 밝아올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격렬하게 울려댔다.
그녀는 한참을 더듬거린 끝에야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회사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바로 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덧붙였지만, 이별이는 졸음이 덜 깨 멍한 상태라 아무것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그녀는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회사? 무슨 회사?
전화번호를 다시 확인해 보니, 주연준의 비서, 임남철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헝클이며 일어나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세수를 한 뒤,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콘라드 타워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시각은 딱 12시 10분, 점심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콘라드 타워 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감히 나한테 손대기만 해봐! 내가 너희 사장의 장인어른이야! 지금 당장 너네들 해고시킬 수도 있어!"
"아니, 이거 완전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당장 주연준 한테 전달해! 이혼을 했으면 당연히 재산 절반은 줘야지!"
"내 딸이랑 3년을 같이 살았어!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집에 있었잖아! 근데 이혼하고 한 푼도 안 주겠다고?! 이게 남자라고 할 수 있어?!"
이별이가 막 도착한 순간 그 마지막 말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새하얘졌다.
전신을 휘감는 극도의 수치심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임남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당신 아버지가 여기서 30분째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회사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이 발생했고, 주 회장님께서는 당신이 3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경찰을 불러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