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거절하지 않았어?
이별이는 손을 뻗어 앞을 막고 있는 이현진을 천천히 옆으로 밀어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예전 친구를 길에서 마주쳐서 인사한 것뿐이에요. 다들 볼일 없으면, 난 먼저 갈게요."
그녀가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별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헛구역질을 했다.
이별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도망쳤다.
차 안에서 배두연은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자, 눈을 뜨며 말했다.
"뭐야, 이렇게 빨리 끝났어? 난 좀 더 오래 얘기할 줄 알았는데."
이별이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묻지 마. 주안희가 이현진을 알아. 그리고 주연준도 왔어. 내가 빨리 도망치지 않았으면, 오늘 목숨 하나 날릴 뻔했어."
배두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주안희? 그..."
말을 하다 말고 멈췄지만, 이별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일 터지고 바로 해외로 튀었잖아? 근데 다시 돌아왔다고?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별이는 입덧이 올라오는 걸 억누르며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두연아, 병원 좀 가자."
"너... 결정한 거야?"
병원에서 검사를 마친 뒤, 의사가 차분히 말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평소 몸 상태와도 관련이 있어서 입덧이 심할 수도 있어요. 기름진 음식 피하시고, 가볍게 산책하면 조금 나아질 겁니다."
이별이는 가볍게 끄덕였다. 의사는 이어서 말했다.
"12주가 지나면 정기 검진을 받으러 오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배두연이 달려왔다.
"별이야, 어때?"
"괜찮대."
배두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이별이의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이자,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가자."
돌아오는 길, 배두연이 잡지사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총 판매량이 이미 백만 부를 돌파했고, 임 편집장이 오늘 밤의 축하 파티에서 이별이가 주인공이라며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배두연은 전화를 끊고 운전석 너머로 이별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별이, 너 괜찮아?"
이별이는 머리를 창에 기댄 채 멍하니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이 아이를 낳고 싶어."
방금 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초음파 화면 속 작은 점을 보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3년 전 떠나보냈던 아이가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스스로 그 생명을 지울 수는 없었다.
배두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좋지! 나랑 같이 키우자. 그리고 나중에 네가 새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그 개자식 애한테 다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게 하면 되잖아. 완전 빡치겠지?"
이별이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게, 그 개자식 표정을 상상하니까 통쾌한데?"
하지만 그녀는 주연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결혼이 비록 좋은 시작은 아니었지만, 끝은 최소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가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이별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낯선 번호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별이야, 나야."
이별이는 휴대폰을 꼭 쥐며 침묵했다.
이현진이 다시 말했다.
"아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했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현진아."
그리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주안희가 한 말, 전부 사실이야. 나 결혼했어. 그것도 좋은 방법으로 한 건 아니야."
"별이야, 난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주안희가 무슨 말을 했든, 전혀 믿지 않아. 네가 왜 주연준과 결혼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그저 알고 싶어. 3년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갑자기 파리 유학을 포기했어? 우린 분명 약속했잖아."
이별이는 눈을 감았다.
"3년 전 일은 다 지난 일이야. 이제 그만 덮자."
"그럼 우리 관계도... 덮어야 해?"
"난 이미 결혼했어."
"하지만 너랑 주연준 사이에 사랑은 없잖아. 별이야, 난 기다릴 수 있어."
그 순간, 휴대폰이 손에서 떨어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녀는 속눈썹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침묵을 유지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다리지 마. 난 그럴 가치 없어."
그리고, 주저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현진은 이별이의 메마른 인생에 들어온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다. 그는 언제나 밝았다. 그녀가 절망에 빠질 때마다, 그는 희망을 밝혀주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 착각 속에서 한동안 헤맸던 것 같다. 그들이 정말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현진의 가문은 주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명문가였다. 그런 집안이, 그녀 같은 가정환경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3년 전, 그녀의 꿈을 박살 낸 그 차가운 현실은 그녀가 꿀처럼 달게 여겼던 환상까지도 산산조각 내버렸다.
꿈에서 깨어났고, 그와의 인연도 완전히 끝나버렸다.
...
이번에 SG 주얼리 매거진이 자체 브랜드를 론칭하며 처음으로 주얼리 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외부 반응 역시 긍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SG의 전략적인 결정이 탁월했다고 칭찬했지만, 그보다 더 화제가 된 것은 SG와 계약한 디자이너, 샤인이었다.
3년 전, 그녀가 에버영 디자이너 컨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부터, 디자인 업계는 그녀의 이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첫사랑 시리즈를 통해 그녀는 다시 한 번 주목받으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녀의 귀환은 완벽한 한 수였다.
하지만 대중이 더 궁금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궁금해하는 것은 그녀가 사라졌던 삼 년 동안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였다.
각종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트와일라잇 클럽의 한 구석에서 강안석은 소파에 파묻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와, 이 가짜 기사들 좀 봐. 마치 진짜처럼 써놨네. 이거 봐, 완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는 휴대폰 화면을 주연준 쪽으로 내밀었다.
"어떤 놈이 그러는데, 샤인이 유명해지자마자 어떤 재벌한테 찍혀서 3년 동안 내연녀 생활을 했대. 근데 최근에 그 재벌의 본처한테 걸려서 쫓겨났고, 경제적 지원이 끊겨서 다시 복귀한 거래. 아니, 이 정도면 진짜 소설 한 편 나오겠는데?"
그의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주연준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물었다.
"강 회장님, 주 회장님, 같이 한 판 하시겠습니까?"
강안석은 고개를 들어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끼리 해. 주 회장님은 출장에서 갓 돌아와서 피곤하시대. 난 그냥 옆에서 좀 쉬고 있을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주연준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에 말한 거, 대회 관계자한테 유학 지원금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냐고 물었다고 했지?"
강안석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 맞아. 근데 너 그거 거절했잖아."
주연준은 잔을 잡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