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제가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겠어요?
임지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놀라서 소리쳤다.
"하 선생님!”
그의 뒤에 서있는 많은 사람들을 본 임지연은 더욱 의아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동생이 자폐증을 앓았을 때, 하유준은 그의 주치의였다. 그러다 보니 둘은 자연스레 알게 됐던 것이다.
하유준이 웃으며 대답하려고 하자, 이 병원의 병원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 선생은 우리 병원에서 진행하는 포럼에 초청되어 오셨습니다.”
하유준은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데 특히 자폐증에 대해 연구가 깊었다.
"지연 씨는요, 왜 여기 있어요? 어디 아파서 왔어요?" 하유준이 물었다.
그의 물음을 듣고 또다시 어머니의 단호한 태도가 떠오르던 임지연은 온몸이 떨렸다.
"지연아!"
이때 장승희가 손에 검사지를 들고 복도 반대편에서 급히 달려왔다. 검사지를 받으러 간 사이, 임지연이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그녀는 임지연을 보더니 바로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던 것이다.
코끝이 찡해난 임지연은 입술을 깨물며 애써 대답했다.
"엄마……"
하유준은 옆에 서 있던 병원장에게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일이 좀 있어서요.”라고 말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만 제가 진심으로 하 선생을 우리 병원에 모셔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은 최대한 만족시켜드릴 테니 꼭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시길 바랍니다.”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머님, 밖에서 얘기 할까요? 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얘기 할 좋은 곳은 아닌듯 해요.”
장승희도 하유준를 잘 알고 있다. 아들이 치료 받을 때, 가끔씩 정말 돈이 없어서 비용을 지불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모두 하유준이 사비로 대주었던 것이다.
하여 장승희는 그를 무척 존중했다.
그러면서 장승희는 임지연이 다시 도망 못가게 손목을 꽉 잡았다.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임지연은 장승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 제발, 지안이도 가버렸는데 나 그냥 이 아이를 남겨두면 안 될까?”
하유준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뜻일까?
그러고는 곧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고 시선은 그녀의 배쪽에 머물렀다.
또 장승희의 손에 든 결과지를 보고 임지연이 임신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너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매우 알고 싶었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임지연은 장승희 앞에서 운적이 많지 않았다. 동생이 죽었을 때도 그녀는 몰래 울었지 장승희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장승희도 그녀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앞날이 어떠할지 너무 뻔했다.
엄마가 되면 강해진다고들 하는데, 그녀의 모습을 보니 포기하게 하는 것은 그른듯 했다.
장승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대로 해.”라는 말만 던지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마음이 아팠지만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답이 없었다.
엄마가 가고 긴장이 풀린 임지연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버텨보려 했지만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울고 싶지 않지만, 참을 수 도 없었다. 마음속에 담아뒀던 상처와 아픔들이 그녀의 오장육부를 갈가먹는 것 같았다.
귀국하기 전, 하유준은 그들을 찾았었다. 그 때 그들이 귀국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의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유준는 임지연 곁에 앉아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겨우 열댓살밖에 안 되는 꼬마였다. 하지만 그 때도 이미 철이 들어 동생과 엄마를 돌보고 있었다.
한 번은 그녀에게 두 개의 도시락을 살 돈밖에 없어 엄마와 동생에게 도시락을 주고 자신은 이미 먹었다고 장승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철이 너무 들어 가슴이 아팠다.
하유준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손이 떨어지기 전에 임지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돈을 벌면 꼭 갚을게요.”
하유준은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멈추어 있던 손을 꽉 쥐더니 천천히 거두었다.
"지연 씨 바보네요. 그건 내가 돕고싶어서 도운거라 돌려줄 필요가 없어요.”
임지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생님의 호의는 고맙지만 당연한 것은 아니에요. 나중에 돈 벌면 꼭 갚을게요.”라며 확고하게 말했다.
하유준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 살아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임지연은 장승희가 걱정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장승희가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집에 도착한 후, 그녀가 문을 열고 내리려 하자 하유준이 물었다.
"나중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
임지연은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안 갈 거예요.”
겨우 돌아왔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집에 돌아오자 임지연은 장승희가 의자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장승희은 눈물을 닦고 그녀를 보지 않았다.
"난 괜찮아, 어서 돌아가.”
"엄마……"
"내가 너를 잘 보살피지 못했어."
장승희은 계속 눈물을 닦아냈지만 야속하게도 눈물은 멈출줄 몰랐다.
임지연은 달려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서로의 아픔을 털어냈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둘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임지연은 자신과 차서운의 거래를 털어놓고는 장승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들을 들은 장승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결혼이 장난일 수가 있지?
비록 그녀는 거래 결혼을 찬성하지 않지만, 딸이 임신한 몸이라 차서운도 딸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된 일 일수도 있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딸을 돌바주겠다고 결심했다.
저녁에 임지연은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차서운는 없었다.
저녁을 먹고 별장 마당을 한 바퀴 돌며 소화도 할겸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시간이 늦어져 방으로 들어갔지만 목이 말라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랐다.
물 반 컵을 마시고 자려고 들어가려는데 손잡이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대문이 열렸다.
곧이어 커다란 그림자가 들어왔고, 그뒤로 아름다운 실루엣이 뒤따라 걸어나왔다.
임지연은 어리둥절했다.
차서운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를 데려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백소정도 그녀를 보고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했다.
이 여자는…… 그때 병원에서 봤던 여자잖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차서운를 바라보았다. 윤곽이 뚜렷한 옆모습은 턱선이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는 그때 왜 화를 냈을까? 설마 이 여자와 관련이 있는 걸까?
여자의 마음은 항상 예민한 법이다. 차서운이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자, 백소정은 자신도 모르게 임지연을 경계하게 됐다.
"저기…… 별 일 없으면 먼저 들어가볼게요."
임지연은 둘 사이의 방해자가 돼서 눈총을 맞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차서운은 그녀를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하얀색 긴 잠옷 원피스가 발목까지 덮었고, 하얗고 가느다란 두 팔은 드러나 있어 청순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다만 그녀가 한 일을 생각하면 은근히 괘씸해났다.
"소정인 여기 둘째 주인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임지연은 그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번도 자신을 이곳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알아요, 그럼 이만 자러 갈게요."
임지연은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
"지연 씨,"
백소정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임지연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백소정의 얼굴에는 깊은 사과의 뜻이 담겨있었다.
"비록 당신과 서운 씨가 혼약을 맺었지만, 저와 서운 씨는 당신보다 오래 알고 지냈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서운 씨와 결혼한 사람은 저였을 거예요. 그러니……"
"그래서 뭐요?”
임지연은 이 여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자기한테 이런 말을 하는거지?
"저는 단지 당신이 서운 씨와 결혼했지만, 서운 씨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저때문인 것 같아 당신에게 미안함을 느껴서요.”
"괜찮아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어색한 관계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맞지 않을까?
차서운 앞에서 그녀의 선량함을 어필하기 위해서인가?
왠지 임지연은 백소정에게 호감이 안 갔다.
차서운은 실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게 지금 무슨 태도야?”
임지연은 입술끝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그저 한 달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그녀의 물건을 갖고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이 이상한 여자가 초면부터 이상한 말을 해댄것이 문제였다.
그럼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럼 제가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겠어요?"
방금 백소정의 말에 그녀는 도저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