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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들다, 중독되다

939.0K · 연재 중
신들린 감자
290
챕터
26.0K
조회수
9.0
평점

개요

단 한 번의 거래로 임지연은 낯선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애가 배긴 상태로 그녀는 자기와 어려서부터 정혼을 했던 남자한테 시집을 가게 되는데... 근데 이 남자, 왠지 자꾸만 익숙하다? 천하의 차서운은 태어나서 여자한테 심장이 뛰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략결혼으로 맞이한 어린 신부가 자꾸만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으며, 그는 어느샌가 이 여자한테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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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난 후회하지 않아

따뜻한 온기가 등 뒤에서 서서히 느껴지면서 축축한 호흡이 귓전을 적시고 있었다.

“무서워?”

귓가를 맴도는 낯선 숨결에 떨려오던 임지연은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남자는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이어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임지연은 긴장하듯 두 손을 꼭 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꽃다운 어린 나이였지만 부득이하게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다.

찢어지는 고통이 세포 하나하나를 타고 온몸에 퍼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남자의 끊임없는 침입을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씩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신음소리에도 낯설고 수치스러워 입을 틀어막았고, 동반되어 오는 가슴을 찢는 아픔은 되는 대로 잡힌 침대 시트를 꽉 잡는 걸로 참는 것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낯선 남자는 쉽게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마지막 그 관문을 쉬임없이 끝까지 공격하고 있었다.

이 밤은 참으로 지독하고도 길었다...

야심한 새벽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남자가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임지연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일어나 옷을 대충 걸친 후 방을 나섰다.

호텔 아래에는 그녀에게 이 장사를 소개한 중년 여성이 있었는데 임지연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검은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 너의 보수야.”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돈을 받아 든 임지연은 빨리 병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하체에서 전해져 오는 살이 찢겨나가는 통증도 무시한 채 빠르게 뛰었다.

날이 밝지 않아 복도는 조용했고 수술실 앞에 들것 두개가 놓여 있었지만 돈을 내지 않았기에 들여보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장면을 본 임지연은 가슴이 메어왔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저 돈이 있어요, 빨리 우리 엄마랑 동생을 구해주세요...”

그녀가 울먹이며 돈을 의사에게 건네자, 간호사가 돈의 액수를 확인한 후에야 의료진을 불러 부상자를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남동생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 것을 보자 임지연이 달려들어 의사를 옷깃을 붙잡고 애걸했다.

“제 동생은요? 제 동생도 제발 살려주세요...”

의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동생분은 이미 살 가망이 없습니다...”

살 가망이 없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임지연은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 났다.

아팠다.

가슴을 칼로 휘젓는 듯한 아픈 고통에 그녀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8년 전, 임지연이 10살 때,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엄마인 장승희를 버리고, 임신한 엄마와 그녀를 낯선 외국으로 보냈다.

나중에 남동생이 태어났고, 3살 때 자폐증을 진단받으면서 원래도 궁핍한 그들의 생활이 남동생의 병 때문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 버렸다. 임지연과 장승희는 여기저기서 품팔이를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번의 교통사고로 가족도, 돈도, 그렇다고 인정도 바랄 것이 없었던 외국에서 그녀에게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꼴이란 뭔지 알게 해주었다.

막막함 끝에 임지연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의 몸을 팔았지만 결국엔 동생을 살릴 수 없었다.

어떤 아픔은 내색하지 않아도 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고, 세상은 순식간에 색채를 잃은 듯하였다.

하지만 임지연은 웃으면서 꿋꿋이 버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아직 엄마가 있었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쓰러지면 안 됐다.

엄마에겐 딸이 필요했으니.

치료를 거쳐 장승희의 몸이 호전되었지만, 동생의 죽음을 알고난 후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임지연이 장승희를 꼭 안고 울면서 말했었다.

“엄마, 엄마한테 아직 내가 있잖아. 나를 위해서라도 꼭 살아줘야 돼.”

병원에 있는 한 달 동안, 장승희는 늘 침대에 앉아 멍을 때리곤 했다. 임지연은 엄마가 동생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딸만 아니었다면 장승희는 아마 동생을 따라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임지연은 엄마를 돌봐야 했기에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했지만, 엄마의 몸이 호전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은 임지연이 먹을 것을 들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을 열려 하는데 문득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8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잊혀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가 그때 엄마를 강요해 이혼하던 모습이 어린 임지연의 기억에 생생했으니까.

그들을 이곳에 보낸 후,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뭘까?

“승희야, 애초에 차 부인이랑 애 혼사를 약속한 건 당신이잖아. 도리상 당신이 정한 혼사는 당신의 딸인 지연이를 보내는 게 맞잖아...”

“임인섭,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장승희는 상처 입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그를 때리려고 했다.

이 남자 그래도 인간인 걸까?

그녀와 딸을 이 낯선 곳에 쫓아내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면서 죽었던 살았던 안중에도 없던 인간이 이제야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그녀더러 딸을 시집보내라고?

“차씨네 큰 도련님은 당신 절친 아들이잖아. 아니, 막말로 잘생겼지, 집안도 좋지. 차씨 집안은 당신도 잘 알잖아, 지연이가 시집가면 좋은 날밖에 없을 거라고......”

유명한 차씨 집안 큰 도련님은 존귀한 신분에 외모도 출중한 건 맞다. 하지만 한 달 전에 출국하여 일을 보는 사이에 독사에게 물려 신경마비가 되어서 지금은 움직일 수도 없고 남자구실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런 남자한테 시집가면 그냥 과부로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 할게요.”

그때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임지연이 문 어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손에 든 도시락을 꼭 쥐며 말했다.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조건이 있어요.”

임인섭은 8년 만에 만난 딸을 보면서 잠시 멍해졌다. 임지연을 이곳에 보냈을 때 그녀는 고작 10살짜리 애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새하얀 피부에 몸은 많이 말라 보였고 작은 얼굴은 손바닥만 한 것이 딱 봐도 잘 먹지 못하면서 자란 모습이었다.

집에 있는 사랑스러운 막내딸내미와는 비교도 안 되게 완전히 딴판이었다.

덕분에 임인섭은 저도 모르게 죄책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임지연이 별로 예쁘지도 않아서 구실을 못 하는 남자에게 시집가도 너무 억울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임인섭은 어깨를 쭉 펴며 말했다.

“무슨 조건인데, 말해봐.”

“저랑 엄마 귀국할 거예요. 그리고 엄마의 것이여야 했던 물건들을 다 돌려주시면 저도 약속할게요. 시집을 간다고요.”

임지연은 긴장한 듯 손을 꽉 움켜쥐며 말하고 있었다.

비록 오래동안 국내에 있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B시에 있는 차씨 집안은 몇조의 재부를 소유하고 있는 가족이 방대한 가문이라고 종종 들었었다. 그러니 차씨 가문의 도련님과 같은 신분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보통 이하인 임지연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차씨 가문의 도련님은 매우 못생겼거나 아니면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녀에게 있어서 귀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잘 되면 엄마의 혼수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연아......”

장승희는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애들장난이 아니니까.

자신을 따라 많은 고생을 한 아이가 혼인으로 인생까지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보던 임인섭은 장승희가 임지연을 설득이라도 할까 봐 급히 말했다.

“그래, 너만 동의한다면 귀국하게 해주마.”

“엄마의 혼수는요?”

명목상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임지연의 시선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때 장승희가 임인섭과 결혼할 때, 확실히 혼수를 많이 가져왔는데, 그건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 이제 임인섭보고 내놓으라고 하면 그도 살이 떨릴 것이다.

“아버지, 저의 그 여동생은 아마 아주 예쁘게 생겼겠죠. 동생은 더 좋은 삶이 있을 텐데, 만약에 신체에 장애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면 평생 끝인 거죠. 게다가, 아버지는 엄마와 이혼했는데, 엄마의 물건을 돌려주는 게 마땅하지 않나요?”

임인섭은 켕기는 듯 그녀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내내 외국에 있던 애가 어떻게 차씨 집안 도련님의 몸이 안 좋은 걸 알지?

임인섭은 몰랐다. 이건 단지 임지연의 추측뿐이라는 것을.

그녀가 결혼할 상대가 신체적 결함이 있는 남자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임인섭은 이를 깨물더니 결심했다.

“그래, 네가 결혼하기만 하면 돌려줄게.”

그가 어찌 꽃 같은 막내딸을 남자구실도 못 하는 남자와 결혼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임인섭의 마음이 그나마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 돈만 떼가려는 임지연이 더욱 꼴 보기 싫어졌다.

임인섭은 차가운 눈빛으로 사람을 흘겨보더니 비아냥거렸다.

“네 엄마가 어떻게 가르쳤길래 넌 예의라곤 전혀 없니?”

‘그럼, 아버지는 책임이 없나요? 이곳에 나를 버려두고 전혀 상관하지 않았잖아요.’

임지연은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뭐라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임인섭을 건드려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건 없으니까.

“준비하고 있어, 내일 돌아갈 거야.”

임인섭은 옷 소매를 뿌리치더니 병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