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결혼식과 의식이 없는 결혼

분명 질문이었지만 뭔가 사람이 거절하면 안 될것 같은 강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임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마침, 그녀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임인섭은 임지연에게 경고의 눈빛을 주며 말했다.

“말 가려서 해야 돼.”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상대의 미움을 사면 안 되니까.

차서운의 차가운 표정을 보면 아마 임지연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차씨 가문의 친척이 되는 것은 어찌 되었든 임씨 가문이 득을 볼 일이고, 회사의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임지연이 혼사를 망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

임지연은 못 본 척하며 곽팔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그녀는 임인섭이 무슨 속셈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대체 그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녀가 결혼하면 꼭 자기를 도와줄 거라 생각하는 거지?

단지 그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언제 그녀를 진짜 딸로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이 8년 동안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이것저것 생각하던 중 머리가 갑자기 단단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임지연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남자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얼굴이 지척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그는 일어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

임지연은 두피가 저려왔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일부러 불구인 척한 거죠?”

차서운은 눈꼬리를 내리고 눈을 가늘게 떴고 속마음을 들킨 불쾌함이 역력했다.

말투는 평온했지만 충분히 겁을 줄 수 있었다.

“내 다리가 불구임에도 나와 결혼하려는 이유가 뭔데? 돈? 아니면 재벌 사모님이 되고 싶은 거야?”

남자의 시선에 임지연은 뼈 밑의 살갗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느낌이었고, 심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꽉 조여져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지만 애써 침착한 척 답했다.

“제가 2살 때 정한 혼사인데, 설마 2살짜리 애가 돈과 재벌 사모님의 좋은 점을 알고 두 어머니에게 혼사를 정하라고 했을 까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제가 2살 때, 아저씨는 10살이었어요. 저보다 8살이나 많은데 저도 아직 싫단 말 안했거든요?

허! 차서운은 냉소를 지었다.

이 여자 입은 살아있어가지고!

그가 늙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살벌했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어느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임지연은 양쪽에 늘어뜨린 손을 꼭 움켜쥐었다. 차씨 집안에 시집가는 유일한 목적은 단지 임인섭이 엄마의 혼수를 돌려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지 이 남자와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임지연은 다시금 자세를 낮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저씨가 결혼을 원치 않은 거 알아요. 실은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요...”

그녀는 일부러 말을 멈추면서 차서운의 표정을 살폈다. 비록 그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임지연은 그걸 포착했다.

“아저씨, 우리 거래해요.”

임지연이 입을 열었다. 그녀도 진짜 차씨 집안으로 시집을 갈 생각은 아니었다. 이에 승낙한 건, 단지 자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허어.”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금 그와 거래하겠다고?

임지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등줄기에는 긴장으로 식은땀이 쫙 흘렀다.

차서운은 키가 너무 커서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말해야 했다.

“알고 있어요. 아저씨가 이러는 거 임씨 집안에서 이 약속을 먼저 깨길 바라서죠. 저도 나름의 고충이 있어서 동의한 거예요.”

이에 차서운은 흥미가 생긴 듯했다.

“원하는 게 뭐야?”

거래라면 조건이 있기 마련이니.

“한 달이면 됩니다. 결혼 한 달 후에 아저씨랑 이혼할게요.”

한 달이면 충분했다. 엄마의 혼수만 되찾으면 바로 이혼할 것이다.

차서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네가 말한 거래야?”

“네, 이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해요. 이건 양쪽 어머니께서 한 약속이니 어길 수 없어요. 두 분에 대한 존중은 지켜야 하잖아요. 하지만 결혼 후에, 우리가 성격상 맞지 않으면 이혼하는 것도 순리적인 거죠. 이러면 아저씨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 살 필요도 없고, 나쁠 거 없잖아요.”

여기까지 말한 임지연은 천천히 말 속도를 줄였다.

“내 생각에 아저씨는 아마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결혼하기 싫은 거죠?”

차서운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제법 똑똑하네.”

그는 확실히 백소정에게 명분을 주고 싶었다.

당시 그녀의 어리숙함과 인내가 그에게는 흔들림을 주었었다.

차서운의 시선이 여자애의 짐짓 침착한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럼 너한테 이 결혼이 무슨 이득이 있는데?”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니 말이다.

임지연은 약간 긴장되었다. 엄마의 혼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대지 않으면 이 남자가 분명 믿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 엄마가 이 혼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엄마 몸이 안 좋으셔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요.”

거짓말한 임지연은 약간 켕기는 듯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엄마는 그녀가 차씨 집안에 들어가는 걸 전혀 원치 않았는데 말이다.

차서운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음산했고 마치 그녀의 속셈을 꿰뚫은 듯했다.

“그래?”

임지연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가시방석이었다. 그녀가 어쩔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남자의 주머니속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차서운이 그녀를 한번 보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위에 나타난 이름을 보자 그의 안색이 이내 한결 부드러워지면서 뒤돌아서서 전화를 받으려 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한 달이면 굳이 결혼식은 치를 필요가 없겠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임지연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8월 12일. 곽팔이가 임지연을 데리러 왔다.

결혼식도 없는 딸랑 결혼 신고서 한 장뿐이지만 임지연은 별로 다른 느낌이 없었다. 이건 단지 거래일 뿐이었으니까.

양가 어머니가 이 혼약을 정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평생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었다.

곧 차가 한 별장 앞에 멈춰섰다.

햇빛 아래, 부지가 매우 광활한 건축물은 기세가 웅장하였다.

“들어가시죠.”

곽팔이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너무 친절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담담한 태도였다. 아마 두 사람 사이의 결혼에 대해 알고 있으니, 그녀가 진정한 차씨 사모님이라고 보지 않은 모양이다.

저택은 크지만 하인은 한 사람뿐이었다. 곽팔은 소개하지 않고 직접 사람을 안으로 안내한 후 바로 떠났다.

임지연은 약간 적응이 안 되었다.

“여긴 도련님의 거처입니다. 저는 도련님 생활을 돌보는 정숙 이모고요. 앞으로 그렇게 불러도 됩니다.”

정숙 이모는 그녀를 방으로 안내하면서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요.”

한 달이란 시간은 길지 않으니 임지연은 자기 생활용품을 챙겨왔다. 그러니 폐를 끼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대답했다.

“네.”

정숙 이모는 방문을 열고 뒤돌아서 뭔가 말하려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도련님께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백소정 씨의 생일이니깐요.”

비록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목상의 아내이고, 오늘 뭐라 해도 신혼 첫날인데, 밖에서 다른 여자와 같이 지내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정숙 이모는 임지연이 참 불쌍해 보였다.

이제 이 집에 들어온 첫날만에 도련님한테서 이런 대접을 받으니, 앞날은 안 봐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