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당신과 결혼할 겁니다

임지연이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오자 왼쪽 탈의실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요.”

패션 감각이 뛰어난 가게 직원들은 대충 보기만 해도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옷을 알 수 있었다. 이 연한 파란색의 긴 원피스는 임지연의 피부를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했고, 중간에 두른 허리띠는 여자의 잘록한 허리를 뽐냈다. 몸매가 꽤 말랐지만 얼굴의 이목구비는 매우 정교했다.

옷이 괜찮다고 생각한 임인섭이 돈을 지불하려 하자 원피스 한 벌에 600만 원이 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차씨 집안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악물고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가자.”

이어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왔다.

임지연은 진작에 그의 무정함을 알았지만, 여전히 그의 쌀쌀한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임인섭의 뒤를 따라 차에 올랐다.

어느덧 차는 임 씨의 별장에 도착했다.

운전사가 차 문을 당기자 임인섭이 몸을 굽혀 차에서 내렸고 임지연도 뒤따랐다.

별장 입구에 선 임지연은 잠시 멍을 때렸다. 그녀와 엄마가 동생의 병 때문에 고달픈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녀의 아버지와 내연녀는 이 멋진 별장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임지연의 두 손은 저도 모르게 꽉 조여졌다.

“따라오지 않고 뭐해?”

뒤에서 사람이 따라오는 기척을 못 느낀 임인섭이 고개를 돌리자 임지연이 문 앞에서 멍을 때리는 모습을 본 것이다.

정신을 차린 임지연이 얼른 뒤를 따라잡았다. 집안의 하인이 차씨 가문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해주자 임인섭은 그녀더러 거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거실의 창가 쪽 자리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랜드라는 브랜드인데 독일산이어서 매우 비쌌다. 그건 임지연이 5살 때 어머니가 준 선물이었다.

이 피아노를 엄청 좋아했던 그녀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외국에 보내진 후로 다시는 보지 못한 것이다.

오늘에 다시 보게 되자 익숙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검지를 건반 위에 얹고 가볍게 힘을 주자 ‘땡!’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하고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았기에 손가락은 많이 굳어진 듯했다.

“누가 내 물건에 손대라고 했어?”

갑자기 뒤에서 노기를 띤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전해왔다.

임지연이 돌아서자 임채윤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다. 기억으로는 자기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이었는데 올해 17살이고, 엄마인 심수정을 닮아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

다만 지금 눈을 부릅 뜬 모습은 보기가 좀 흉악할 뿐이었다.

“네 거라고?”

엄마의 가정을 깨트리고, 엄마의 돈을 쓰고 있으면서 이제는 엄마가 그녀한테 준 선물도 그들이 것이 된 건가?

임지연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고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아직 그녀의 것이어야 한 것들을 다시 되찾을 그럴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참아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8년 전에 아빠한테 버림받아 울기만 하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너는... 임지연?”

임채윤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은 차씨 가문에서 손님이 오는 날이라 아버지께서 그 모녀를 데려온 것이다. 임채윤은 임인섭이 두 모녀를 외국으로 보내려고 할 때, 임지연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애걸복걸하던 그 불쌍한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아빠가 널 데려오니까 기분이 좋아?”

임채윤은 팔짱을 끼고 그녀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기뻐하는지는 마. 널 데려온 건 단지 차씨 집안에 시집보내기 위해서야. 듣자 하니 그 남자는...”

말하면서 임채윤은 입술을 가리고 낄낄 웃었다.

임지연이 남자구실도 못 하고 걷는 것조차도 못하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걸 생각만 해도 깨고소했으니.

혼인이라함은 한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런 남자한테 시집간다는 건 인생을 망치는 거와 뭐가 다를까?

임지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바로 이때 하인이 다가와 일렀다.

“차씨 집안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임인섭이 친히 마중을 나갔다.

그때 임지연이 몸을 돌리자 휄체어를 탄 채 밀려 들어오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출중한 외모는 휄체어에 앉아도 만만하게 볼 수 없을 만큼 그 기운이 강력했다.

이 사람은, 그 탈의실에서 여자와 알콩달콩하던 남자가 아닌가?

이 남자가 차씨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하지만 탈의실에서 분명 서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말이다. 그 여자를 껴안고 있던 남자의 다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남자가 왜 이런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임인섭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연아, 어서 오너라. 이분이 차씨 가문의 도련님이시다.”

임인섭은 허리를 굽히고 아부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차 도련님, 여긴 제 딸 지연입니다.”

임인섭은 속으로 살짝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생긴것도 출중한 명문가 차씨의 큰 도련님이 불구가 되었다니.

차서운의 시선이 임지연한테로 고정되었다.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너무 말라서 영양실조에 걸린 듯한 여자애의 모습에 남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건 어머니가 그를 위해 정한 혼사였고, 게다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아들로서그는 약속을 어길 수가 없어서 독사에게 물린 독이 제거되지 않았다고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불구가 되고 남자구실도 못하니 임 씨에서 혼사를 거절하길 바랐다.

그러나 뜻밖에도 임씨 집안에서는 그 혼사를 무를지 않았다.

차서운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임인섭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줄 알고 급히 설명했다.

“얘가 이제 겨우 18살이라 어려서 그래요. 나중에 더 예뻐질 겁니다.”

차서운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예쁜 건 모르겠고, 오히려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그가 ‘불구’라는 것도 불구하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니.

그의 차가운 눈초리에 입가에 휘어진 곡선은 의미심장해 보였다.

“제가 해외에 출장 갔다가 실수로 다쳤어요. 그래서 지금 걸을 수도 없고, 남편으로서의 직무도 실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상관없어요.”

임지연이 즉시 대답했다.

임인섭이 분명 그녀가 차씨 집안에 시집가기만 하면 엄마의 혼수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결혼한 후 이튿날에 이혼하더라도 반드시 이 결혼을 해야만 했다.

이쯤에야 임지연은 모든 걸 깨달았다. 이 남자는 다리가 문제없지만 휄체어를 타고 온 걸 보면, 그때 그 여자를 위해서 약속을 이행하고 싶지 않아서 임씨 집안에서 이 혼사를 거절했으면 하는 바람에 그랬던 것이라는 걸 말이다.

다만 임인섭이 사랑받지 못하는 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 약속을 지킬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차서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임지연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임지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도 원해서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귀국해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입꼬리가 움찔하더니 입가에 쓴 웃음을 띠었다. 그속의 말못할 고충과 쓴맛은 아마 자기 자신밖에 모를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조한 혼사이니, 당신이 어떻게 되든 난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차서운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 여자 말은 참 잘하는데?

임인섭은 이상하다는 걸 알아듣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결혼 날짜는......”

차서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다.

“당연히 약속대로 해야죠. 이건 양가가 오래전부터 정한 것이니, 약속을 어길 수는 없죠.”

임지연은 눈을 떨구고 감히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가 이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뻔한데 말이다.

지금 동의한 것은 그저 약속 때문일 테니까.

“좋습니다.”

임인섭은 그저 속으로 매우 기뻤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러운 딸 하나로 차씨 가문과 사돈을 맺었으니 당연히 기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임씨 집안도 돈은 많았지만 차씨 가문과는 비할 바가 안 되었다.

전혀 같은 레벨이 아니었다.

임인섭은 허리를 굽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미 저녁을 준비해 놓았으니, 식사하고 가시죠.”

차서운은 이마를 찡그렸다. 그는 권세에 빌붙어 알랑거리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아니요, 볼일이 있어서요.”

차서운이 거절하자 그의 비서 곽팔이 그를 밀며 밖으로 향했다. 임지연의 곁을 지나갈 때, 차서운은 문득 멈추라는 손짓을 하며 시선을 들었다.

“임지연 씨, 혹시 시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