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녀를 알 수가 없다
“뭔데요? ”
임지연은 의문스러웠다.
의자에서 일어나던 차서운은 휘황한 조명을 등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평온하고도 느렸다. 마지막에 임지연의 앞에 멈춰섰고, 그는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우린 아직 부부관야, 다른 남자랑 멋대로 애정행각을 벌이지 마.”
무슨 이유로 결혼했든 간에 결혼 기간엔 절대로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건 그의 마지노선이고 남자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임지연은 한참이 지나도록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그녀가 누구랑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걸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반박했다.
“근데 당신은 다른 여자랑 여기서 밤까지 보냈잖아요. 그럼 저도 아내의 자격으로 당신에게 요구해도 되나요?”
차서운은 미간을 더욱더 세게 찌푸렸다.
“난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진 않았어.”
임지연을 어안이 벙벙했다. 어젯밤 분명 백소정이 여기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그런데 잠자리를 안 했다고?
그걸 누가 믿어?
잠깐만,
둘이 잤던 안 잤던 그녀랑 무슨 상관인데?
거기다가 차서운은 안색이 계속 바뀌는 게 지금 뭐 하는 거지?
임지연은 그와 사이가 틀어질 생각이 없었던터라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그럼 제가 최대한 당신의 요구에 맞출게요. 그럼 전....”
그녀는 손에 든 서류를 흔들었다. 그녀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차서운은 담담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 말투에는 일말의 화가 느껴졌다.
임지연에게 화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왜 자신이 그녀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 거지?
미쳤다, 미친 게 분명하다.
이런 평소와 다른 행동은 그를 적응할 수 없게 했고 심지어 그런 자신에게 반감까지 들었다.
임지연은 레스토랑에 성공적으로 지원해서 이 번역 서류들을 빨리 완성하려고 했다.
자정일 때 그녀는 겨우 반만 완성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아주 졸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녀는 서류를 가지고 거실로 갔다. 이 시간의 별장은 조용했고 차서운과 정숙 이모님도 아마 다 잠에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류를 티테이블 위에 놓고 주방에 가서 온수를 컵에 따라 마셨다. 컵을 내려놓은 후 거실로 돌아가 카펫에 앉아 티테이블에 엎드려 계속해서 번역했다.
차서운은 목이 말라 한밤중에 물을 마시려고 내려와 보니 임지연이 아직도 번역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임지연도 그를 발견했지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차서운은 집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에 습관 되어 테이블 위에 물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마셔버렸다.
“그건....”
임지연은 그에게 그 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알려주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컵으로 물을 마셔버려서 그녀는 말하려던 말을 어떻게 입 밖에 낼지 몰랐다.
차서운은 그녀를 힐끔 보더니 그녀가 말을 하다가 만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몇 초 동안 머무르다가 곧장 머리를 숙였다. 하얀 불빛을 통해 컵 입구에 반쯤 겹친 연한 입술 자국을 발견했다.
그것의 반은 그가 아까 물을 마시던 자리였다
그가 아까 입을 댄 곳은 딱 봐도 누가 입을 댓던 곳이었다. 아까 임지연의 반응을 봤을 때 그녀였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임지연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얼굴은 왠지 모르게 뜨거워 났다.
둘은 하도 낯설어서 컵을 같이 쓰는 건 너무나도 친밀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의도하고 그런 건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임지연은 여전히 부끄러웠다.
차서운은 입술을 움직이며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그도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아예 컵에 남은 물을 쭉 들이켜버렸는지 모르겠다.
이윽고 그는 빈 컵을 내려놓고 이쪽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들고 시계를 봤다. 시간은 이미 한 시였다.
“아직도 안 자?”
임지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
“전 아직 피곤하지 않아요.”
차서운은 2초 동안 그녀를 조용히 보고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앞까지 갔을 때 그는 갑자기 그녀가 회사에 지원한 적 있는데 합격하지 않았단 것이 떠올랐다. 그는 이 점이 이상해 방으로 가서 곽팔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에 푹 자고 있던 곽팔은 전화 소리에 잠을 깨니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잔뜩 짜증이 난 상태에서 침대 머릿장 위의 전화를 잡고,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욕을 할지 다 생각해 놨지만, 전화 액정에 나타난 이름을 보고 순간 졸았다.
그는 눈을 비빈 후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너 한번 알아봐, 인사부 쪽에서 왜 번역원을 거절했는지.”
“네?”
곽팔이 그게 정확히 무슨 일인지 확인도 못 했는데 그쪽에서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
그는 멍하니 전화를 보았다.
아니 이 밤중에 고작 이 일 때문에 전화했다고?
곽팔의 얼굴은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이건 남의 잠을 깨우는 짓이잖아!
그는 그저 투덜거릴 뿐 감히 차서운에게 대들 용기는 없었다.
다음날, 정숙 이모님이 일어나 보자 임지연이 테이블 위에서 자는 모습을 발견했다. 정숙 이모님은 그녀의 앞에 놓인 종이들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업무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못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잠도 안 자고 목숨 걸고 일할 필요 없잖아? ”
비록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정숙 이모님은 그래도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때 차서운이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정숙 이모님이 임지연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정숙 이모님의 눈가에 잔주름이 깊게 패인 것과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닦은 도량을 보아냈다.
그는 그쪽으로 가서 몸을 숙여 임지연이 번역한 서류를 손으로 들었다.
22장의 서류를 그녀는 손수 써서 번역했다.
이걸 다하려면 하늘에 해가 다 떴을 텐데. 이 여자, 온밤을 지새운 건가?
차서운 저도 모르게 그녀를 보았다.
정숙 이모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돌아서고는 주방으로 가서 아침 준비를 했다.
임지연이 깨났을 때, 차서운은 이미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비비고는 두 손을 테이블에 지탱하고 일어나려는데 그만 다리에 쥐가 났다. 그녀는 한참 지나서야 걸을 수 있었다.
그녀는 욕실로 가 세수한 겸에 정신 차리기 위해 샤워까지 했다.
임지연은 옷을 다 입고 나와서는 번역을 다 한 서류를 차서운 앞에 내놓았다.
“다 했어요. ”
서류를 내놓은 후 그녀는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다가 말했다.
“지금 가능하시면 돈을 저한테 주세요. ”
임지연은 그가 잊을까 봐 한 말이다.
차서운은 커피잔을 놓고는 그녀를 2초 동안 바라보았다.
“난 습관적으로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아. 좀 늦을 때 회사로 날 찾아와. ”
말을 마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지연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굳이 입금하는 방식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돈만 주면 되니까.
임지연이 이렇듯 목숨 걸고 서류를 번역하는 이유는 오늘의 일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다.
차서운이 문을 나선 지 얼마 안 돼서 임지연도 문을 나섰다.
레스토랑에는 통일된 유니폼이 있었다. 임지연은 하얀색 티셔츠에 검은 조끼, 옷깃에 맨 나비 넥타이에 허벅지를 뒤덮는 스커트를 입고 곧고 가느다란 다리를 내놓았다.
창문에 가까운 위치에서, 백소정은 기분이 유난히 좋았다. 오늘은 차서운이 먼저 식사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비록 차서운이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는 한 번도 주동적으로 그녀와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그녀가 능동적이었다.
“서운 씨....”
“내가 듣기에는 임지연이 번역원으로 지원한 걸 네가 막았다며? ”
그가 아침 일찍 회사에 가니 곽팔이 그에게 보고했었다.
임지연이 번역원으로 지원한 일을 백소정이 수를 썼다고 말이다.
그 말에 백소정은 두 손을 갑자기 꽉 쥐었다.
그가 어떻게 이 일을 안 거지?
차서운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창밖의 따뜻한 햇볕은 그의 몸에 내리쬈고 그는 나른하게 턱을 괬다. 그의 깊은 눈속에는 이유를 알아내려는 뜻이 담겼다. 어렸을 적에 자신을 구하고 또 그의 해결 약이 돼준 착한 그녀를 이 순간 그는 알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