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녀는 A 국어를 할 줄 안다

임지연은 온몸이 굳어졌다.

하유준이 자신을 갑자기 안아버릴지 몰랐던 그녀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린 임지연은 몸을 빼내려고 버둥쳤다.

그러나 그 장면을 지켜보던 차서운의 각도에서는 꼭 마치 그녀가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백소정은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말을 뱉었다.

“지연 씨한테 남자 친구가 있는 줄 몰랐네. ”

차서운은 괜히 마음이 답답하고 자증이 치밀었다. 그리고 이내 액셀을 끝까지 밟고 질주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백소정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물었다.

“당신 화났어요? ”

“내가 왜 화가 나야 되는데? ” 차서운은 코웃음을 쳤다.

임신도 한 여자가 당연히 남자가 있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은 기분이 완전히달랐다. 그는 그냥 불쾌했다!

차는 빠르게 백소정의 거처에 세워졌다. 그녀는 바로 내리지 않고 차서운을 보면서 말했다.

“잠깐 올라가지 않을래요? ”

그에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던 백소정은 다급하게 또 한마디를 더 보탰다.

“서운 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했는데... ”

“소정아. ”

차서운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도 자신이 왜 그런지 몰랐다. 그냥 마음이 괜히 복잡하고 이상했다.

그는 손을 내밀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은 안 올라갈게, 너도 일찍 쉬어. ”

“하지만....”

백소정은 결국 말을 못 꺼내고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운전 조심히 해요. ”

차서운은 응하고는 차를 운전하고 나갔다.

그는 거의 질주하다시피 차를 몰고 집에 돌아왔지만, 임지연은 아직 오지 않았다.

차서운은 약간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임지연은 언제 나갔어요? ”

“점심에요. ”

정숙 이모님은 그의 손에 있는 오버코트를 받으면서 말했다.

“지금 저녁을 드실 건가요? ”

“이따가요. ”

그는 지금 입맛이 없었다.

셔츠 단추를 두 개나 풀어서 분명 목이 죄지 않는데도 그는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런 이상한 기분은 그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서재의 문을 열었다. 임지연이 그에게 남긴 메모지는 아직도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 메모지를 들고 그녀를 차갑게 비웃었다.

“내 앞에서는 불쌍한 척, 힘든 척을 하더니 뒤에서는 다른 남자와 놀아나? 참 대단하다! 임지연! ”

메모지는 그의 손에서 한 줌으로 구겨졌다.

임지연이 택시를 타고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 하유준은 그녀를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유준에게 그녀와 차서운의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거절했다.

돌아온 임지연은 집에는 정숙 이모님밖에 없고 차서운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여기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느슨해졌다.

정숙 이모님은 임지연이 기분 좋아 보여서 물었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요?”

사실은 없지만 임지연은 그냥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그가 없어서 제가 자유로운 것 같아서요. ”

정숙 이모님은 말을 하지 않았다.

“네 뜻은 내가 차라리 사라져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진 차서운은 서재문 옆에 비스듬하고도 나른하게 기대어있었는데, 그의 무심한 말투엔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이 목소린....

임지연은 굳어버린 몸을 돌려서 보니 음침한 모습을 한 남자가 문 옆에 기대고 서있는 게아닌가.

아니, 그가 집에 왜 있는 거지?

집에 돌아와 보니 그가 없어서 임지연은 자연스럽게 그가 집에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별생각없이 말한 것이다.

“저는....”

임지연은 바로 해명하려고 했지만 차서운은 그녀를 지나 주방 쪽으로 가서 정숙 이모님에게 밥을 먹겠다고 했다. 임지연은 식탁 앞에 앉아 몇 번이나 해명해 보려 했지만,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차서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저 밥을 다 먹은 뒤 그녀에게 한마디 말만 했다.

“날 따라와. ”

밥을 먹던 임지연은 그의 말에 젓가락을 놓고 쭈볏쭈볏 그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차서운은 책상 앞에 앉고는 그녀가 번역한 자료를 그 위에 내려놓고 담담하게 그녀를 흘겨봤다.

“너 A 국어를 할 줄 알아? ”

임지연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 점이 차서운은 이상했다.

“왜 이 언어를 배우는 거지? 이 언어는 국제적으로 통용이 잘 안 되고 있는데? ”

그녀가 8년이나 생활했던 곳이 언급되자 그녀 마음속에 상처로 가득했던 기억들이 상기되었다.

하지만, 이 아픔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그녀 자신만이 그 시절의 초라함과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누구 앞에서도 그것을 드러내기 싫었고 그건 그 상처들에 뜨겁게 달궈진 소금을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그리하여 이 시각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주 홀가분한 웃음이 띠었다.

“좋아해서 그냥 배웠어요. ”

차서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보기에는 기분을 잘 숨기는 것 같지만 눈 밑에서 빠르게 사라진 슬픔은 결코 그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녀는 도대체 뭘 숨기고 뭘 덮으려는 거지?

“너 여기 와봐. ”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임지연은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그녀는 이 남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또 어쩔수 없이 그와 교섭해야만 했다.

그녀는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다가갔다.

차서운은 한 개의 서류를 그녀의 앞에 놓았다.

“네가 할 줄 안다면 이 서류를 번역해서 나한테 줘. ”

임지연은 고개를 숙이고 보니 파일 오른쪽 위 모서리에는 만국그룹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어젯밤 그녀는 서류 번역에만 신경을 쓰느라 오른쪽 위 모서리의 로고를 보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번역원을 이미 찾은 거 아니었어요? ”

차서운은 눈썹꼬리를 치켜세웠다.

임지연은 서류를 받은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당신네 회사에 번역원으로 지원을 했었는데, 처음에는 저를 마음에 들어하면서 출근하라고 했다가 또 왜인지 갑자기 제가 적합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

“그런 일이 있었어? ”

그가 말하는 매 글자와 매개 표정은 심사숙고하는 듯해 보였다.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어 보였다.

임지연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서류. 제가 당신을 도와 번역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임지연은 욕심이 많은 게 아니라 지금 자신한테 아무것도 없다 보니 주제넘게라도 이 중에서 이득을 얻으려고 했다.

차서운은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리 경고를 해두었다.

“리펄스만의 부지를 원하는 거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너희 임 씨 가문은 그걸 얻을 능력이 안 돼. ”

임지연은 아까도 이걸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인섭에게 양도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기 손에 카드가 쥐어진 셈이니 임인섭과도 담판할 조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명백히 거절하고 있다.

번역 서류 몇 장으로 부지를 바꾼다는 건 딱 봐도 불가능했다.

“그럼 돈으로 주세요. ”

잠시 엄마의 혼수를 다시 되찾지 못한다면 먼저 돈을 벌어 엄마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고 곧 아기도 태어날 거니까 그녀는 아주 많은 돈을 벌어야만이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임지연이 서류를 펼쳐보자 20여 장이나 되었다.

“한 장에 2만 원, 비싸게는 안 받을게요. ”

차서운은 말이 없었다.

임 씨 가문이 이렇게 돈이 부족한가?

이 여자의 행동은 왜 점점 알 수가 없는 것 같지?

차서운이 말이 없자 임지연은 그가 싫다는 줄 알고는 또 말했다.

“진짜 안 비싸요. 가격이 부담스러우시면 조금 더 내려드릴게요. ”

“그럴 필요 없어. 네 말대로 해.”

“알겠어요. ”

임지연은 서류를 들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짧은 시간에 다 완성 못 하니까 방으로 가져가서 잘 번역하고 다시 당신한테 보내줄게요. ”

“기다려. ”

“네? ”

임지연은 의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한 가지 일을 알았으면 해.”

그는 눈빛은 어두웠고 마치 경고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