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방금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었어?

강서인은 짐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 짐을 싸고, 이숙경의 저지와 욕설을 무시한 채 캐리어를 끌고 택시를 잡아 떠났다.

저녁 7시쯤, 그녀는 명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곧 멍해지고 말았다.

박시후는 분명 주소와 출입 비밀번호를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던것이다.

‘설마 까먹은 건가?’

그녀는 박시후의 전화번호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건 별장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8월의 날씨는 밤이 되어서도 끈적하고 무더웠다.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오르던 그녀는 ‘그냥 박씨 그룹 본사로 가서 박시후를 찾아버릴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녀 같은 사람이 박시후를 쉽게 만날 리가 없었다.

약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별장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려다 실패한 강서인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사장님! 박 사장님……!”

그 소리에 박시후가 차를 세웠다.

땅에 쪼그려 앉아 있는 강서인을 보자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살짝 흔들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강서인은 속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눈앞의 사람에게 대놓고 불평할 용기는 없었다.

벽을 짚고 간신히 일어서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이 정확한 동도 안 알려주시고, 비밀번호도 안 보내주셨잖아요. 제가 여기 안 있으면 어디 있겠어요?”

“미안.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깜빡했다.”

박시후는 짧게 해명한 뒤 그녀에게 차에 타라고 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방금 네 눈빛… 나한테 불만 있었던 거야?”

강서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불평이라도 했다간 내일 아침 뉴스에 박씨 그룹 직원 실종이란 기사가 뜰지도 모른다.

입속으로 불만을 삼키며,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차에 올라탔다.

차는 불과 2분 정도 달려 한 채의 독립형 별장 앞에 멈춰 섰다.

강서인은 캐리어를 들고 박시후를 따라 들어갔다.

그가 문을 열면서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강서인은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차가운 색감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미니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네 방은 2층 왼쪽. 오른쪽은 내 방이랑 서재니까, 내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마.”

“집 안 물건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네, 사장님.”

규칙이 많긴 했지만, 이숙경과 강주혁과 함께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게다가 이제 아버지의 병원비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반년 후면 약간의 돈이라도 모아서 남성에 작은 아파트를 장만할 수도 있겠지.

환한 미래를 상상하며 강서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짐을 정리하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박시후는 이미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 장의 서류를 건넸다.

“이건 내 취향이다. 오늘 밤 다 외워. 내일 할아버지 앞에서 실수하면 안 돼.”

강서인은 조용히 서류를 받아들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 럭셔리한 저택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군.

그녀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 취향도 알려드릴까요?”

“필요 없어.”

박시후는 무심하게 대답한 뒤 바로 돌아섰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은 이미 조사 완료했으니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강서인은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건넨 서류를 펼쳐보자, 그가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심지어 속옷 사이즈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조사한 거야…?’

대충 훑어본 후, 강서인은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자기 전, 핸드폰을 들고 본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아침 박시후와 함께 박진동을 만나야 하니 하루 휴가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잔소리 심한 본부장은 곧바로 폭발했다.

[서인 씨, 오늘도 오후 반차 썼으면서 내일 또 휴가야? 안 돼. 승인 못 해. 너 내일 출근 안 하면 개근 수당은 없는 거 알지?]

강서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박씨 그룹의 개근 수당은 무려 50만 원.

그녀에게는 한 푼도 소중한 돈이었다.

하지만 내일은 어쩔 수 없이 박시후와 함께 가야 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