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무정한 자본가

박시후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내 별장은 명원에 있어. 정확한 주소와 출입 비밀번호는 이따가 보내줄게. 오늘 밤부터 그곳으로 이사해.”

“…좋아요.”

어차피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원래부터 집을 나가고 싶었으니, 이건 괜찮았다.

“내일 할아버지를 뵈러 가자.”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반년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반년 후, 우리는 이혼할 거다. 그동안 넌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면 돼.”

“그리고 그 외의 일들은 신경 쓰지 마라.”

그 말이 떨어지자, 강서인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그 외의 일’이란 당연히 ‘박 사장의 아내 자리’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 문제는…”

박시후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짧게 답했다.

“곧 사람을 보낼 거다.”

“네, 감사합니다, 박 사장님.”

그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검은색 롤스로이스에 올라타더니 그대로 떠났다.

결혼 서류를 받고 나자마자 그녀를 내팽개치다니, 역시나 무정한 자본가였다.

강서인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손에 남은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 몇 개를 내려다보았다.

절약해야 하니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집 안의 소리가 그대로 새어 나왔다.

이 집은 방음이 형편없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강서인은 안에서 들려오는 이숙경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혁아, 걱정 마. 유의성이 네 누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더라. 어떻게든 네 누나를 시집보낼 테니까, 그러면 정아의 결혼비용이랑 너희 신혼집도 해결되는 거야.”

딸을 팔아서 아들의 결혼 자금을 마련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강서인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숙경은 서둘러 말했다.

“유의성이 널 마음에 들어 했어. 네가 좀 불만이 있는 건 알지만, 사람이 괜찮잖니? 나이는 좀 있지만 널 잘 보살펴줄 거야! 게다가, 아이도 낳을 필요 없고…”

강서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끊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면 직접 시집가요. 전 안 갑니다.”

탁!

이숙경은 화가 나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강서인! 넌 반드시 시집가야 해! 내가 네 엄마야! 네 결혼은 내가 결정해!”

강서인은 가방에서 결혼증명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결혼했어요. 중혼은 불법이거든요?”

이숙경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달려들며 소리쳤다.

“결혼? 누구랑? 강서인, 네가 누구랑 결혼을…”

이숙경이 결혼증명서를 잡으려는 순간, 강서인은 재빨리 그것을 가방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무심한 태도로 신분증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녀는 결혼 상대가 박시후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대충 둘러대듯 말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직원이랑요. 엄마가 원하던 대로 빨리 결혼하고 집에서 나갔으니 됐죠?”

“너, 너, 너…”

이숙경은 분노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강서인! 너 나한테 이럴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속 터져 죽겠어!”

강서인은 그녀를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몇 분 후, 이숙경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방으로 따라왔다.

“강서인, 네가 누구랑 결혼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네 동생이 결혼 준비 중이야. 누나로서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겠어?”

“돈 없어요.”

“그럼 당장 이혼하고 유의성이랑 결혼해! 우리 강 씨 집안이 널 키웠잖아! 동생을 그냥 내버려 둘 거야?”

강서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이숙경의 손을 뿌리쳤다.

“날 키운 건 아빠예요. 아빠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내 대학 등록금은 내가 스스로 벌었어요. 엄마가 날 언제 키웠죠?”

그녀는 문가에 기대어 구경하듯 서 있는 강주혁을 바라보며 차갑게 덧붙였다.

“그리고 전 강 씨 집안의 친딸이 아니죠. 그러니까, 혈연도 없는 동생을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네요.”

강서인은 열두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한 뒤 모든 기억을 잃었다.

그때 병원에 근무하던 강성태가 그녀를 입양했다.

그동안 이숙경과 강주혁에게 애정은커녕 정조차 없었다.

오직 강성태에게만 그녀는 진정한 가족애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