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첫째 날, 임가연이 성지환이 직접 새우를 까주는 사진을 보냈을 때, 한시아는 라이터를 꺼내 그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둘째 날, 임가연이 벚나무 아래에서 성지환과 입맞추는 사진을 보냈을 때, 한시아는 인부를 불러 그가 직접 심었던 정원 뒤편의 체리나무를 모두 베어냈다.
셋째 날, 임가연이 생방송 중 성지환이 자신에게 고백한 말들을 모은 영상을 보냈을 때, 한시아는 그가 예전에 자신에게 썼던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꺼냈다.
세월이 흘러 종이는 바랬지만, 글씨는 여전히 또렷했다.
그녀는 잠시 손끝으로 그 글씨를 쓸어보다가, 미련 한 점 없이 한 장도 빠짐없이 전부 분쇄기에 넣었다.
……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눈을 뜨자, 한시아는 오랫동안 집에 없던 성지환이 침대 곁에 서 있는 걸 보았다.
그는 그녀의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나자, 그의 표정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시아, 방금 네 폰으로 문자가 왔더라. 탈퇴 완료라던데, 뭘 탈퇴한 거야?"
그 말에 한시아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휴대폰을 빼앗아 화면을 켰다.
'신분 정보가 성공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다행히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서, 그는 문장 몇 개만 본 듯했다.
한시아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소셜 계정이 해킹당해서, 그냥 복구하고 바로 탈퇴했어."
그제야 성지환은 안도한 듯 숨을 내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우리 이쁜이, 내가 뭐 사왔는지 맞혀볼래?"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동쪽 성가로의 찹쌀떡."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성지환의 눈이 놀라움으로 반짝였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연애하던 시절, 성지환은 그녀를 화나게 할 때마다 그 먼 길을 달려가 찹쌀떡을 사 와 사과하곤 했다.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그녀는 금세 마음이 풀렸다.
한시아는 보석도, 고급차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그 한입의 달콤함이면 충분했다.
그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시아, 너무 단순해서 좋다."
그녀는 그의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답했다.
"내가 단순한 게 아니라, 아직 사랑하니까 그래. 내가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네가 내 앞에서 죽는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야."
그때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성지환은 뒤에서 찹쌀떡 상자를 꺼내 들며 웃었다.
"역시, 넌 내가 뭘 해도 다 알아차리네."
한시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난 네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지."
그 말에 성지환의 심장이 순간 움찔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시아야…"
하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성지환은 다급하게 무언가 챙기며 문을 나서고 있었다.
한시아는 단 2초 정도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조용히 따라나섰다.
문 앞까지 걸어가던 한시아는 걸음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 임가연이 서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뻔뻔하게, 그것도 이 집까지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놀란 사람은 한시아뿐만이 아니었다.
성지환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재빨리 다가가 임가연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미쳤어? 여길 왜 와! 내가 뭐라고 했어? 시아 있을 땐 절대 나타나지 말랬잖아!"
그의 고함에 임가연이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곧 눈가가 붉어지고, 서럽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 당신 없이 단 한순간도 못 견디겠어요. 우리 아기도요."
그녀는 그의 손을 끌어 자기 배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성지환은 차갑게 손을 빼냈다.
"그만해. 지금은 시아 앞이야. 조용히 있어. 내가 비서를 불러서 데려다 줄게. 며칠 뒤에 가서 볼 테니까."
임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나 비서랑 안 가요. 당신이랑 같이 가야 해요."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성지환의 넥타이를 움켜쥐고 발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입술을 들이댔다.
성지환은 처음엔 찌푸린 얼굴로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가 끈질기게 따라붙자 결국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며 입맞춤을 되받았다.
두 사람은 정원 한가운데서 점점 깊게 얽혔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옷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 순간, 성지환은 정신을 차린 듯 거칠게 그녀를 밀어냈다.
"이제 그만 가."
임가연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달라붙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성지환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 그는 낮게 말했다.
"좋아. 오늘 하루는 너랑 있을게. 차 먼저 타고 있어. 금방 갈게."
임가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차에 올라탔고, 이내 차가 출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시아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성지환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첫마디는 언제나처럼 달콤했다.
"시아야, 원래 오늘은 너랑 하루 종일 같이 있으려 했는데 방금 회사에서 급한 전화가 왔어.
나 잠깐 다녀올게. 오늘 일만 끝나면 하루 종일 곁에 있을게, 응?"
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머물렀다. 대답을 기다렸지만, 한시아는 그저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바라볼 뿐이었다.
그 한눈에, 성지환은 숨이 멎은 듯 굳어 버렸다.
언제부터일까.
시아의 눈 속에서 더 이상 빛이 사라져 버린 건.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시아야……"
무언가 말을 잇고 싶었지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 바쁘잖아."
입꼬리를 살짝 올린 미소, 목소리에는 아무런 기복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조용했다.
그는 그제야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가볍게 돌아섰다.
잠시 뒤, 차 시동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가는 경적음이 들렸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한시아의 얼굴에서 미소도 함께 사라졌다.
대신 두 줄의 눈물이 고요히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식탁 위의 찹쌀떡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미리 싸 두었던 여행가방을 꺼냈다.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 후, 성지환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보름이 지났어. 전에 당신에게 준 결혼기념일 선물, 이제 열어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이쁜이, 나 금방 돌아갈게. 같이 보자.]
한시아는 천천히 웃었다.
같이?
성지환, 이제부터는 네 혼자야.
남은 생은 오직 네 혼자뿐이야.
그녀는 임가연이 보냈던 모든 메시지를 성지환에게 전송하고, 망설임 없이 휴대폰 유심을 꺼내 반으로 꺾었다.
그리고 가방을 들어 문을 나섰다.
밖은 아침 햇살이 찬란했다.
하늘 아래, 땅 끝까지 이제 누구도 한시아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