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게 뭐야?"
나는 검은 레이스를 들어 올렸다. 가슴속은 폭풍처럼 뒤흔들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아, 그거… 지난주 드라이클리닝이 뒤섞인 거 있잖아. 아마 그거일 거야."
드라이클리닝 착오?
우리 차에서 다른 여자 속옷이 나온 이유가 그거란다.
"정말로요?"
나는 브라를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70C, 프렌치 레이스, 태그도 안 뗀 새것인데?"
"유지영, 너무 과민하게 굴지 마."
"내가 과민하다고?"
말이 채찍처럼 터져 나왔다. "사흘 전에 우리 아기를 잃었는데, 그게 과민 반응이라고?"
그제야 그는 나를 제대로 바라봤다.
순간 스친 죄책감.
그리고 곧 짜증으로 덮어버린 얼굴.
"그 일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아무 상관 없다니.
모든 게 그 일 때문인데.
모든 게.
"그래요."
나는 낮고 담담하게 말했다. 브라를 독이라도 되는 듯 조심히 조리대 위에 내려놓으며.
"상관없지."
왜냐하면 이건 속옷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추락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가 나 대신 그녀를 선택한 순간부터 이미 끝난 일이었으니까.
내가 우리의 미래를 잃고 피를 흘리며 버티는 동안 그는 이틀 동안 연락 한 번 없었던 그 사실 때문이었고.
내가 땅콩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건 기억 못 하면서, 그녀가 덴마크 페이스트리를 좋아한다는 건 정확히 기억하는 그 마음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
"대화는 여기서 끝이에요."
나는 그의 말을 끊고 계단 쪽으로 걸었다.
"어디 가?"
"출근 준비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는 자기 일은 해야 하니까."
점심 약속은 이미 그녀한테 잡아놨겠지.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준비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블레이저, 익숙한 굽의 단정한 힐, 그동안 갈고닦은 완벽한 유능한 직장인의 얼굴.
김씨 그룹으로 향하는 길이 오늘따라 전혀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
차를 평소 자리에 세우고 엘리베이터홀을 바라보았다.
저 반짝이는 문.
내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그날의 문.
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그 순간.
가슴이 조여들고,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할 수 없었다.
저 철제 상자 안으로 다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날의 일 이후로, 그리고 그가 누구를 선택했는지 너무 똑똑히 본 이후로는 더더욱.
유지보수 카트 뒤쪽에 숨듯 있는 계단실 문을 밀어 열고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32층짜리였다.
15층쯤에서는 다리가 비명을 질렀고,
25층에 도착했을 때는 폐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32층에 올랐을 때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싸우는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문서를 열었다.
사직서 – 유지영
커서가 심장박동처럼 깜빡였다.
지금이야. 이 기만을 끝낼 때다.
"유지영 씨?"
회계팀 주희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칸막이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얼굴이—"
"등산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보이지?"
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좀 타. 제발."
다시는 안 탈 거야.
점심을 데우려고 탕비실에 들어갔을 때, 속삭임들이 공기 중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어젯밤 베르나뎅 레스토랑에서 둘이 같이 있는 거 봤다던데..."
"—완전 허벅지에 손 얹고 있었대..."
"—불쌍한 유지영, 다들 아는 걸 걔만 몰랐대..."
나는 태연하게 커피를 저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내가 부정해온 현실의 못자국이 되어 박혔다.
다들 알고 있었다.
나만 몰랐던, 가엾은 여자친구만.
"어머!"
마케팅팀 이혜리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지영 씨! 거기 있는 줄 몰랐네."
"원래 존재감이 좀 없어요."
나는 아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뒤에 흐른 어색한 침묵은 예상보다 훨씬 달콤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32층을 걸어 올라갔다.
계단 한 층 한 층이 내 안의 잃어버린 조각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이 건물은 내 일터이기도 하다.
엘리베이터가 무섭다고 해서 내 삶까지 잠식하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이제 엘리베이터가 공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을 거다.
그날 밤, 김서우는 화해라도 하려는 듯 무언가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네가 좋아하는 거 사왔어."
그는 버블티 컵을 흔들어 보였다.
라벨을 보니, 타로 밀크티에 펄 추가.
"저거 내가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건조하게 말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한 박자 늦게 반박했다.
"맞아. 네가 맨날—"
"그건 이민선이 좋아하는 거야."
내가 말을 끊었다. "나 타로 죽도록 싫어해요. 백 번은 말했는데."
이제 백한 번째다.
그의 얼굴이 여러 표정을 스쳐 지나갔다.
혼란, 깨달음, 그리고 즉각적인 방어적 분노.
"너 요즘 정말 왜 그렇게 답답해?"
"답답해?"
내 웃음은 금 간 유리처럼 삐걱거렸다. "답답한 게 뭔지 알려줄까요?"
"유지영—"
"답답한 건 새벽 두 시에 네가 그녀한테 메시지 보내는 걸 못 본 척해야 하는 거고."
"일하는 사이야."
"답답한 건 네가 몇 달 동안 나한테 거짓말한 걸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거고."
"피해망상 좀 그만—"
"답답한 건,"
내 목소리가 올라갔다,
"온 사무실 사람들 앞에서 불륜을 대놓고 떠들고 다니는 널 보고도 내가 웃어야 한다는 거야!"
"됐어!"
그가 소리치며 컵을 카운터에 내리쳤다.
타로 밀크티가 대리석 위에서 폭발하듯 튀며 온 바닥을 갈색으로 물들였다.
참 딱 맞는 광경이었다.
"답답한 게 뭔지 말해줄까?"
그는 낮고 차갑고, 보드룸에서 사람 눌러 찍을 때 쓰는 그 위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너랑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야."
"그럼 그만하자."
나는 낮게 말했다.
"좋아. 그리고 이렇게 된 김에 의미있는 얘기를 해보자."
그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스크롤했다.
"민선이 생일이 내일이야. 네가 케이크 좀 만들어줘."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다.
"…뭐라고요?"
"네 초콜릿 케이크 있잖아. 가나슈 들어가는 거. 그녀가 집에서 만든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했어."
그는 지금 내가 내 손으로... 그 여자 생일 케이크를 굽기를 원한 건가?
나는 물 속에서 숨이 막히듯 목구멍이 꽉 조여왔다.
"내가 그걸 받아들——"
"유지영, 제발. 너 베이킹 잘하잖아. 우리 기념일 케이크도 너가 만들었잖아."
그날 너는 거의 손도 안 대고, 밤새 그녀한테 메시지 보내느라 바빴지.
"민선이가 수제를 원한대."
그는 내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말을 이어갔다.
"시중에서 산 건 정성이 없어서 싫다나 봐."
수제를 원한다라...
"알겠어."
내 입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다른 건?"
"특별하게 만들어줘. 네가 하는 그 예쁜 필체로 '생일 축하해'도 적고."
그는 내가, 내 삶을 망가뜨린 여자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정성스럽게 쓰길 바랐다.
"해줄게."
나는 이미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인사팀이 사직서 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며칠은 필요하겠지.
그동안만 버티면 된다.
"너 오늘따라 순순한데?"
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었다.
"당신이랑 싸우는 거… 지쳤어."
나는 자연스럽게 거짓말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내가 요즘 좀… 예민했어."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
역시. 너무나 예상 가능한 남자.
"이렇게 다시 이성적으로 얘기하니까 좋다."
안도 섞인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이게 내가 사랑했던 그 유지영이지."
아니, 이건 네가 하는 만큼 똑같이 거짓말을 배운 새로운 유지영일 뿐이야.
"오늘 밤부터 케이크 준비할게."
나는 말했다.
"민선이 생일에 완벽하게 맞춰서."
그리고 내게도 완벽한 날이 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