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케이크는 완벽했다.
세 겹의 진한 초콜릿 시트,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직접 반죽하고 구워낸 결과물이었다.
가나슈는 검은 비단처럼 윤기가 흘렀고, 수년 전 김서우 생일 케이크를 만들 때 익힌 장미 모양을 정교하게 짜올렸다.
위에는 금빛 필체로 쓴 문구.
Happy Birthday
한때는 우리 기념일 케이크 위에 올렸던 그 우아한 글씨로.
버터크림 한 주름 한 주름을 정성으로 쌓아올렸다.
단, 그녀를 위한 마음은 단 하나도 담기지 않은 정성.
나는 케이크를 온갖 각도에서 찍었다.
손톱 사이에 남은 밀가루, 앞치마에 묻은 초콜릿 자국, 밤새 나를 지탱한 집중력과 노동의 흔적들.
나의 헌신을 증명하는 증거.
그리고 나의 굴욕을 증명하는 증거.
신생아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차 안에 실었다.
하지만 차까지 가려면 또 하나 마주해야 할 적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나는 여전히 그것을 탈 수 없었다.
결국 또다시 계단을 택했다.
이번엔 케이크를 들고 32층을 내려가는 길.
이 케이크는 내가 떠나기로 결심한 모든 것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도심을 빠져나가며 조심스레 운전하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이민선: 오늘 케이크 만든다면서? 얼마나 가정적이야. 뭐, 그럭저럭은 하겠지. 떨어뜨리지 마, 너 원래 손 좀 많이 가잖아? 하녀주제에.
????
손이 많이 간다고? 하녀 주제에?
내가 그녀 생일 케이크 하나 완벽하게 만들려고 여덟 시간을 쏟아부은 후에?
내 남자친구랑 몇 달 동안 바람피운 주제에?
참 뻔뻔하기도 했다.
나는 럭셔리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며 손끝 하나 떨리지 않았다.
밤새 유지해온 프로페셔널한 침착함을 그대로 유지했다.
나는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 그 이상이었다.
나는 이런 굴욕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누려야 할 여자였다.
커피숍은 잠깐 미뤄도 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케이크를 전달하고, 연기를 하고, 그다음에야 진짜 숨을 쉴 수 있으니까.
하녀처럼 굴어라.
작은 비서.
네 자리를 지켜.
나는 이민선의 메시지를 캡처하며 손을 꼭 쥐었다.
나중을 위한 증거였다.
커피숍에 들르자 오 여사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줬다.
"늘 마시던 걸로?"
"아니요."
내가 먼저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오늘은 새로운 걸로 해볼게요."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뭐 한 거야?"
김서우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말 그대로. 당신이 부탁한 대로 케이크를 전달하는 중인데."
"민선이가 울잖아!"
그는 거의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가 무례하게 굴었다던데?"
나는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열었다.
"내게 하녀라고 한 건 말했어?"
침묵.
"알려줘? 문자로 남아있거든, 서우."
"그녀가… 감정적이었겠지. 생일이니까."
나는 방금 아기를 잃었다.
그런데 우선순위는 그녀의 감정이라고?
"맞아."
나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받을 자격이 있지."
"좋아. 프랑스 베이커리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마카롱 좀 사서, 직접 가서 제대로 사과해. 그녀 집으로."
그는 내가 그녀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완벽했다.
"그럼."
나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우리 민선이를 위해서라면야 뭐든."
"나도 거기 있을 거야. 우리… 프로젝트 준비 중이라."
프로젝트.
이제 불륜을 그렇게 부르나 보지?
"곧 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가 봤다면 소름 돋았을 웃음이었다.
두 시간 뒤, 나는 값비싼 마카롱 상자와 김서우가 '특별한 날'에만 아껴 마시는 스카치 한 병을 들고 이민선의 고급 아파트 문 앞으로 섰다.
문이 열리자 실크 로브 차림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상력 따위 필요 없을 만큼 대놓고 드러난 차림이었다.
"어머!"
그녀는 과장되게 놀라며 손을 모았다.
"유지영 씨가 직접 구워서 가져온 거야?"
"생일 축하해."
나는 대답하며, 초대받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케이크 상자를 열자, 완벽하게 화장된 얼굴 위로 순간적인 놀라움이 스쳤다.
"이거… 진짜 예쁘네."
억지로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걸 네가? 혼자서?"
마치 내가 크레파스 그림 자랑하는 유치원생이라도 된 듯한 말투였다.
"세 겹 모두 내가 했지."
나는 달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정에 반죽하고, 새벽까지 굽고, 아침에 데코레이션까지."
"꽤… 성실하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한 얼굴.
아마도 그녀가 바라던 건 초라한 케이크였겠지.
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셔츠는 반쯤 잠긴 김서우가 나왔다.
아주… 대놓고 은근하네, 둘 다.
"유지영!"
그는 케이크를 보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와, 대단한데? 디테일 좀 봐, 진짜 멋지다."
이럴 때만 내 실력을 알아보지.
그녀를 위한 거니까.
"봐? 내가 재능 있다고 했잖아."
그는 이민선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장미 모양 데코를 들여다보며 마지못해 존중을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엄청… 가정적이네."
간신히 뱉어낸 말이었지만, 이미 날카로움은 사라져 있었다.
분명히 자기 손으로는 못 만들 것 같으니까. 평가할 힘도 없겠지.
"아침 일은 말이야—"
그가 다시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나는 이미 스카치 병의 마개를 열고 있었다.
마카롱 상자는 테이블 위에 자연스럽게 내려놨고.
잔이 넉넉히 채워졌다.
"일단 축하부터 하자."
나는 글라스를 건네며 제안했다.
"민선 씨 생일이니까. 사랑을 담아 만든 선물과 함께."
그 사랑이 누구를 향한 것이든 간에.
"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내가 말을 끊으며 잔을 부딪치자 그는 고민도 없이 들이켰다.
참 예측 가능한 남자였다.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면 뭐든 쉽게 믿는다.
"이 케이크 정말 특별하네."
이민선은 억지로 작은 조각을 맛보며 말했다.
"가나슈가 완전히 매끈해."
좋은 건 티가 나니까.
입에 대는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지.
"내 특별 레시피야."
나는 자연스럽게 거짓말하며 김서우의 잔을 다시 채웠다.
"기술 익히는 데 몇 년 걸렸어."
그 말에 그녀가 목이 막히길 바랐다.
"한 잔 더 하자."
내가 잔을 들었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김서우는 또 마셨다. 이번엔 더 깊이, 더 크게.
완벽했다.
문서에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인할 만큼의 취기.
"있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서우 씨가 서명해야 할 재밌는 서류를 좀 발견했거든."
"서…류?"
말끝이 살짝 흐려졌다.
나는 가방에서 폴더를 꺼냈다.
겉보기엔 정말 평범해 보이는 김씨 그룹 결재 서류들.
그 사이에 내 사직서와 면책 합의서가 고이 끼워져 있었다.
"그냥 간단한 결재야."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사직 승인서와 퇴사 관련 서류들.
예산안 사이에 조용히 숨어 있는 폭탄.
그의 손이 익숙한 속도로 페이지 위를 움직였다.
수천 건의 계약서에 서명해온 손놀림.
읽지 않고도 사인하는 습관.
"됐어."
그는 만족스럽게 몸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그래."
나는 조용히 동의하며 서류들을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를 꺼냈다.
빛을 받은 순간,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벽에 무지갯빛을 흩뿌렸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그가 준 반지.
6년 치 무관심과 외면을 덮어보겠다며 던져준 허황된 보상.
"뭐 하는 거야?"
김서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살아났다.
술기운도 막지 못하는 위기의 감각.
"민선 씨 생일 선물 주는 거지."
나는 차분하게 말하며 소파에 얼어붙어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완벽한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줬다.
"축하해."
나는 따뜻하게 말했다.
"네가 이긴 거야."
"유지영—"
그가 일어서려다 비틀거렸다.
"일어날 필요 없어."
나는 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둘이서 해야 할 '프로젝트'가 남았잖아."
이민선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나를 올려다봤다.
감탄도 승리감도 아닌, 공포에 가까운 무언가가 눈에 비쳤다.
똑똑한 여자네.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나는 무너지는 게 아니라 벗어나는 중이라는 걸.
"아, 민선 씨."
문을 잡고 돌아섰다.
"휴대폰 봐. 감사 인사 하나 보냈어."
그녀가 나에게 보냈던 조롱 섞인 메시지를 그대로 되돌려 보냈다.
인사팀과, 소문 퍼지기 좋아하는 몇몇 동료들에게도 함께.
공항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끝이야, 김서우.
서류는 서명됐고, 이제 나 따라오지 마.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나를 집으로 데려갈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