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오희진을 방에 들여보낸 심도윤이 거실로 내려왔다.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
"유안아. 당신도 알잖아. 희진이 걔, 지금 기댈 곳이 나밖에 없어. 화 풀지, 응? 대신 이달 집안일, 내가 다 할게."
그러면서 그가 내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몸을 틀어 피했다.
심도윤의 손이 허공에서 멋쩍게 멈췄다.
순간, 모든 걸 터뜨리고 싶었다. 왜 나한테 이따위로 구는 거냐고.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으면서, 왜 나랑 결혼했냐고.
그리고 왜… 전생에, 나를 죽여야만 했냐고.
하지만 이미 모든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 관계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심했다. 마지막 체면은 지켜야지.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 그 '소중한 친구' 분, 단속이나 잘해. 내 생활 방해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나는 '친구'라는 단어에 일부러 가시를 담아 말했다. 심도윤이 내가 오희진과의 관계를 안다는 걸 눈치챘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귀를 막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심도윤이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이미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 나는 뱃속의 아이를 지울 것이다. 이런 거짓투성이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할 순 없었다. 그건 아이에게 너무 불공평한 일이니까.
...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눕자, 등골을 타고 오르는 냉기가 전생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나 역시 이렇게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 위 조명은 눈이 부시도록 밝았고, 나는 그 빛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던 심도윤의, 독기 서린 눈빛을 똑똑히 기억한다.
마취약이 퍼지면서 의식이 흐려졌다.
'아가야, 미안해….'
전생에도 이 세상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이번 생에도 결국…
엄마의 이기심을 용서해줘.
아빠의 사랑도 받지 못할 가정에서, 혹은 편부모 가정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착각 속에서, 너를 태어나게 할 수는 없었어.
간호사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가 멍했다. 아랫배가 텅 비어버린 감각. 마치 심장의 한구석이 통째로 도려내진 듯한 상실감이었다.
핏기 하나 없는 입술로 집에 돌아오자,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심도윤이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희진은,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집이 내 집이라는 사실만 빼면, 누가 봐도 완벽하게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평생 나만을 위해 요리하겠다던 그 남자가, 이제는 다른 여자를 위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때, 쓰레기통에 버려진 닭털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속에서 역한 것이 치밀어 올라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조류에 공포증이 있었다. 닭털만 봐도 피부에 두드러기가 돋았고, 닭고기 종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심도윤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 집 식탁에 닭 요리가 올라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희진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은 이렇게 간단히 무시될 수 있었다.
심도윤은 내 시선을 따라가다, 미처 치우지 못한 닭털을 발견하고는 찔끔하며 변명했다.
"아, 희진이 걔 지금 몸이 약해서. 보신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금방 치울게."
나는 시선을 거두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방에 들어가 쉬려는데, 오희진의 곁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내 손목을 홱 잡아챘다. 그리고는, 제 몸을 스스로 뒤로 세게 밀어 넘어뜨렸다.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심도윤의 시선을 끌었다. 오희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눈물을 터뜨렸다. 그 모습은 한없이 가냘프고 억울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며 울부짖었다.
"유안 언니… 제가 언니 눈에 거슬리는 거 알아요. 나가라면 그냥 나갈게요. 그렇다고 저를 이렇게 밀어서 화풀이하시면 어떡해요…."
심도윤은 손에 묻은 밀가루를 닦을 새도 없이 달려왔다. 그는, 그대로 나를 거세게 밀쳤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다리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액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자, 새하얀 바지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임유안! 너 미쳤어? 희진이 걔 방금 수술 끝난 거 뻔히 알면서 손을 대? 넌 사람이냐? 내가 알던 임유안이 이렇게 악독한 여자인 줄은 몰랐어!"
쓴웃음이 났다.
정말 실망하면, 화를 내는 대신 침묵하게 된다고 했던가.
지금의 내가, 꼭 그 짝이었다.
오희진도 방금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나도, 방금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그가 단 1초라도 내게 시선을 줬다면, 내 안색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이제 됐다.
심도윤은 오희진을 소중하게 안아 들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거기서 반성이나 해. 정신 차리고 병원 와서 희진이한테 싹싹 빌어!"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해 줬나? 아주 버릇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천장을 뚫겠네! 어떻게 사람이 공감 능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