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유안아? 무슨 생각해? 설마 오희진이 연락해서 화난 거야?"
심도윤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겉보기엔 분명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전생의 그 끔찍한 죽음을 떠올리자, 등 뒤는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쥐어짰다.
"심도윤. 그냥 오희진 씨한테 가 봐.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
순간 그의 얼굴에 스친 당혹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토록 자신에게 집착하던 내가 갑자기 너그러워져서 의아한 걸까? 아니면, 사실은 당장이라도 오희진에게 달려가고 싶었는데, 마침 내가 구실을 만들어주길 기다렸던 걸까?
하지만 심도윤은 끝내 거절 의사를 고수했다.
그 가식적인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차라리 같이 병원에 가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제야 심도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그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펴는 것을.
사실 심도윤의 말이 맞았다. 나는 분명 그를 미치도록 사랑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런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원래 심도윤은 임성 그룹, 즉 아빠 회사의 말단 직원이었다. 나와 연애하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는 홀로 나를 키우셨다. 안타깝게도 내가 결혼하기 직전, 아빠마저 불치병을 얻으셨다.
아빠는 심도윤을 탐탁지 않아 하셨다. 하지만 내가 그를 너무 좋아했기에, 아빠는 병상에서 심도윤에게 '평생 유안이를 사랑하고 지켜주겠다'는 맹세를 듣고서야 편히 눈을 감으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심도윤의 마음에 진심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전생에 죽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그저 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생각뿐이었다는 것을.
그가 오희진을 잊지 못한 이유는, 그가 오희진을 가장 사랑했던 그 시절,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고 난 뒤, 그는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오희진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만 우스운 광대였다.
한창 전생의 기억에 잠겨 있을 때, 차가 멈췄다. 심도윤은 어딘가 찔리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여전히 다정한 손길로 나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그의 손길을 피하며, 일부러 태연하게 웃었다.
"이제 겨우 2개월인데, 뭘 이렇게까지 해.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내가 그의 손을 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예전의 나는 그에게 찰싹 붙어 다니기 바빴다. 아주 사소한 스킨십에도 하루 종일 행복해했으니까.
심도윤은 그 자리에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병원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걸음은 몹시 다급했다. 마치 뒤에 내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처럼.
그 조급함이, 오희진을 향한 그의 진심을 이미 다 드러내고 있었다.
분명 다 마음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런 심도윤을 직접 눈으로 보니, 심장이 따끔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천천히 다가갔을 때, 오희진은 심도윤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요. 왜… 왜 다른 여자랑 결혼했어요?"
창백한 얼굴로 저렇게 애처롭게 우는 모습은, 내가 봐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가련했다.
꼭,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건 오희진이 아닌 것만 같았다.
심도윤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주 정직하게 오희진의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오희진은 심도윤이 나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 남자나 붙잡아 결혼해 버렸다. 반년 전, 그 남자가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갔는데, 덜컥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희진은 심도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하소연하면서. 심도윤은 겉으로는 무시하는 척했지만, 내 몰래 오희진에게 돈을 부치고 있었다.
나는 원래 돈에 무감각했고, 심도윤이 얼마를 쓰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생에 그가 술김에 진실을 말실수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남의 여자 뒤나 봐주는 '호구' 노릇을 하고 있었겠지.
간호사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오다 나를 밀쳤다.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넘어질 뻔했다.
"산모님 남편분이시죠? 빨리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 주세요. 시간 지체하시면 안됩니다."
심도윤은 간호사의 호칭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황급히 동의서에 사인을 휘갈겼다.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전생에 심도윤은,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았었다.
역시, 그의 마음속에서 오희진이 차지하는 무게는 이 정도였던 것이다.
오희진은 수술실로 실려 가면서도, 심도윤의 손을 애절하게 붙잡고 놓지 않았다.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윤 씨… 나 무서워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심도윤이 막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던 찰나, 문득 내 쪽을 힐끗 봤다. 그의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나는 그저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가 봐.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심도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오희진의 손을 잡고 수술실로 따라 들어갔다.
병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 머릿속도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오희진의 상태가 정말 심각했다면, 심도윤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 연극을 파헤치고 싶진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오희진이 수술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심도윤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간호사가 부럽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남편분이 정말 지극정성이시네요. 다른 남자분들은 이런 거 보면 놀라서 도망가기 바쁜데, 남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곁을 지키시더라고요."
간호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박혔다.
오희진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는 못 지켰지만… 그래도 곁에 이런 남자가 있어 주는 걸로, 저는 충분해요."
말을 마친 오희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에는 노골적인 도발과 승리감이 어려 있었다.
그래, 오희진은 저렇게 의기양양해도 됐다. 심도윤과 결혼한 건 나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오희진의 것이었으니까.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조용히 돌아섰다.
저렇게 애틋하고 다정한 그림은, 두 사람이 실컷 즐기도록 남겨둬야지.
유리창 너머로, 심도윤이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따라오려는 듯 발을 떼려다, 오희진이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병실로 돌아갔다.
병원 건물 1층 로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아까 차에서 내릴 때 겉옷을 깜빡했던 것이다.
그토록 나를 극진히 챙기던 심도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