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저택은 화려하면서도 서늘한 무덤 같았다.
밤이 내려앉자 나는 값비싼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걸친 채, 마치 예쁘게 치장만 해놓은 개처럼 끌려가듯 홀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거리는 속삭임이 뱀처럼 귀 속으로 스며들었다.
배신자 헨리 밴스의 딸, 보스의 새 장난감, 자기 영혼이랑 존엄까지 팔아먹은 년…
나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톱을 박아 넣었고 입술이 갈라질 정도로 꽉 물었다.
쓰러지지 마, 엘리노어.
그 순간, 그녀가 나타났다.
세레나 블랙우드, 바닥을 끌 만큼 긴 붉은 드레스를 입고 해맑게 웃으면서 에이든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태도는 너무나 친밀했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늦어서 미안, 자기."
세레나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고, 완벽한 안주인처럼 미소를 넓혔다.
"다들 나 알지? 블랙우드랑 크로스의 결혼 동맹은 운명이야, 우리 두 집안을 더 강하게 만들 거고."
결혼 동맹? 약혼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어질어질했고 귀에서는 웅 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제야 세레나가 마치 이제서야 나를 발견한 것처럼 시선을 내려 주더니, 연민과 비웃음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 에이든은 원래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거 주워 오는 걸 좋아하잖아."
"그래도 장난감은 말이야." 그녀의 시선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발밑 먼지를 보는 것처럼 가볍고 더러워하는 눈빛이었다. "결국 장난감일 뿐이지, 사람들 앞에 내놓을 급은 아니거든."
피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모욕감, 분노, 배신감이 한꺼번에 타올라 이성을 집어삼켰다.
나는 에이든을 바라보며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목 안이 죄어 목소리가 떨렸다.
"약혼녀가 있으면서 감정은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저한테 그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한 거죠?"
에이든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더니, 나를 똑바로 보면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엘리노어, 네 위치부터 똑바로 알아."
나의 위치.
우스울 만큼 비천하고, 원수의 딸을 짓밟기 위해 마련된 '애인'이라는 이름의 장난감.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팡이를 짚은 나이 많은 일가 어른이 앞으로 나섰고,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훑었다.
"밴스 집안 피는 더럽지, 예전부터 배신에 능했어. 크로스 가족 안에 남고 싶다면 제일 밑바닥 자리라도 피로 맹세해야지, 네 '충성'을 증명해 봐야 할 거다."
보석이 박힌 단도가 내 앞에 들이밀어졌다.
등골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발끝에서 치솟았다.
피의 맹세?
거의 노예 낙인과 다를 바 없는 의식이었다. 내가 가진 마지막 자존심과 자긍심까지 갈가리 찢어버릴 의식.
나는 에이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말없이 서 있었고, 회색과 푸른빛이 섞인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연극이 드디어 막을 올리는 걸 지켜보는 배우처럼 느긋해 보였다.
그는 허락했다.
심장이 얼더니 온몸이 깊은 얼음 구덩이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그가 원한 그림이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나를 모욕하고, 짓밟고, 끌어내리는 것. 배신자의 딸, 죽어 마땅한 쓰레기를 처벌하듯이.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견뎌야 했다.
"받을게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 헨리 밴스, 그리고 나 엘리노어 밴스는 절대 더럽고 비열한 배신자가 아니에요."
나는 손을 내밀었고, 얼어붙은 손가락이 힘겹게 그 무거운 단도를 움켜쥐었다.
칼날이 왼손바닥에 닿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몸이 움찔했다. 눈을 질끈 감고 내려 긋기 직전이었다.
"그만."
손목이 거칠게 움켜잡혔다.
에이든의 눈동자에 잠깐 후회 같은 빛이 스쳤다가 바로 사라졌다. 남은 건 냉혹함뿐이었다.
그는 단도를 빼앗았고, 모두의 놀란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내 허리를 거칠게 끌어당겨 단단한 몸에 붙여 세웠다.
그가 홀을 훑어보며 낮게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모든 소음을 짓눌렀다.
"얘는 내 사람이다. 내 손으로만 짓밟을 수 있어. 누가 감히 나를 넘어서 벌을 주겠다면 그 순간부터 나랑 맞서는 거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과 일그러진 세레나의 얼굴을 뒤로한 채 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차갑기만 한 객실로 돌아오자 그는 나를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힘껏 소파 위로 내던졌다.
그리고 내 턱을 세게 움켜쥐어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너무 가까워서 그의 눈 속에 비친 내 창백하고 초라한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여기서 네 가치는 하나야. 내가 너를 가지고 놀다가 화가 풀리는 것, 그게 전부야."
"발톱 세우고 이빨 드러내는 꼴 집어치워. 배신자는 결국 배신자야."
그의 숨이 내 얼굴에 뜨겁게 떨어졌다. 위스키와 차가운 삼나무 향이 섞인 숨결이었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거대한 정적이 방 안을 삼켰다. 버티고 버텼던 힘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서러움과 공포,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가슴을 후벼 팠다.
나는 카펫 위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모른 채 울다가 결국 눈물이 마르자 차갑게 식어버린 결심만 남았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기회를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