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정민석,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하민아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야. 정말 순수해, 마치 흰 종이 한 장처럼."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박우혁의 목소리는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나오자, 그 톤엔 깊은 피로가 섞였다.
"인정해, 이소리는 좋은 여자야. 그래도 아무리 천사 같은 여자라도 10년 동안 같이 자면 질리지 않겠어? 이제는 그녀를 봐도 도무지 반응이 안 와."
"맨날 하는 얘기라고는 집안일, 생활비, 애 얘기뿐이지. 뭐든 간섭하고, 차가운 음식 먹지 말라, 담배 피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앞이 다 뻔히 보이는 인생이야.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하지만 하민아는 달라. 해변에선 나랑 장난치고, 눈 오는 날엔 거리에서 먼저 키스를 요구해. 비 오는 날엔 미친 듯이 나랑 손잡고 물웅덩이를 밟고 뛰어다니지."
"그녀와 있을 때 나는 채아의 아빠도, 이소리의 남편도, 부모님의 아들도 아니야."
"그냥 박우혁이야.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정민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어깨를 두드리며 낮게 말했다.
"그래도, 우혁아. 사람은 결국 현실에서 살아야 해."
"연애야 달콤하지. 하지만 결혼은 결국 생활이야."
"내가 딱 잘라 말할게. 이소리를 잃으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거야."
박우혁은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담배를 비벼 껐다.
"걱정 마. 내 인생에 후회란 단어는 없어."
"이 년 동안 내가 돈 벌어 집 유지하고, 이소리는 그 돈으로 먹고 입었어. 나 아니면 그런 호사 누릴 수 있었겠어? 난 할 만큼 했어."
"이제 남은 인생,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순간, 룸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든 시선이 나와 박우혁, 그리고 하민아 사이를 오갔다.
나는 못 본 척했고, 손에 든 생일 케이크를 들고 태연하게 오늘의 주인공 송유진에게 다가갔다.
"생일 축하해, 유진아."
그녀는 정민석의 아내로, 성격이 시원시원한 여자였다.
우린 꽤 친했다.
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유진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일부러 하민아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뭐라더라, 하민아 씨였나? 우리 모임엔 첫 자리일 땐 규칙이 있어요. 처음 오는 사람은 모두에게 한 잔씩 돌려야 하거든."
"첫 잔은 소리 씨한테 해요."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모두의 시선이 하민아에게 집중됐다.
나 역시 오늘 처음으로 그녀를 제대로 봤다.
연한 분홍빛 원피스, 부드럽게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겉모습은 연약하고 순진해 보였다.
하민아는 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저… 술은 잘 못 마셔요."
송유진이 비웃듯 말했다.
"한 번은 어색하고, 두 번은 익숙해지지. 박우혁 애인 노릇도 하는데,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어색할 거 뭐 있나요?"
하민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다.
세상 가장 억울한 사람처럼 보였다.
결국 박우혁이 나섰다.
"유진 씨, 그만해요. 괜히 그녀 힘들게 하지 마세요."
"아직 어린 애잖아요, 당신들이랑은 달라요. 이 술은 내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다시 단단히 맞부딪혔다.
"어머, 이제는 대놓고 감싸네?"
송유진이 비웃듯 말하며 손에 든 잔을 탁자 위에 내리꽂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팽팽해졌다.
"박우혁 씨, 사람 참 잘 챙기시네요. 근데 왜 당신 부인은 그렇게 안 챙기나 몰라?"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유진 씨, 그건 제 집안일입니다. 그쪽이 끼어들 일 아니에요."
정민석은 옆에서 송유진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용히 만류했다.
정민석이 아무리 말려도 송유진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집안일이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단숨에 높아졌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내연녀 감싸는 게 그게 집안일이야?"
"박우혁, 부끄럽지도 않아?"
순식간에 테이블 위 공기가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괜히 술잔을 만지작거렸고, 누군가는 몰래 내 얼굴을 살피며 내 반응을 기다렸다.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킨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하민아가 눈가를 붉히며, 목소리를 떨었다.
"죄송해요, 오빠…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울며 뛰쳐나갔다.
박우혁은 나를 짧게 노려보더니, 곧장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소리야, 괜찮아?"
송유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답했다.
"고마워, 유진아."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안타깝게 말했다.
"너는 왜 항상 이렇게 차분하니. 나 같으면 진작 뒤집어엎었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