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나는 송유진과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가자 나도 화장실에 들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박우혁에게 위로받고 금세 기분이 풀린 하민아였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천장의 하얀 조명이 우리 둘의 얼굴을 똑같이 비추었다.
박우혁이 곁에 없자 그녀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순진한 척하던 얼굴 대신,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따졌다.
"이소리 씨, 일부러 송유진 언니 시켜서 나 곤란하게 만든 거죠?"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당연히 있죠. 박우혁이 곧 당신이랑 이혼할 텐데, 질투나서 그런 거잖아요?"
내 목소리는 냉정했다.
"질투? 뭘?"
"어린 나이에 남의 가정을 깨고 들어간 걸? 아니면 내가 쓰다 버린 남자를 주워 간 걸?"
하민아의 눈이 커지며 분노가 끓어올랐다.
"입 좀 곱게 놀려, 이소리!"
"박우혁은 이미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건 바뀌지 않아. 오히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면 그가 더 질려 할 걸. 참 불쌍해."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이혼? 좋아. 박우혁은 명백히 잘못한 쪽이니까, 난 그 사람 빈손으로 내보낼 거야."
"그럼 나는 집도 있고 돈도 있고 딸도 있겠지. 그게 뭐가 불쌍해?"
나는 피식 웃었다.
"오히려 너는 스무 살 조금 넘은 나이에 시어머니 모시고 시누이까지 상대해야 할 텐데, 변 못 가린 어른 뒤치다꺼리하면서 살겠네. 그게 훨씬 불쌍하지."
하민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곧 이를 꽉 깨물고 버텼다.
"이소리 씨, 너무 꿈같은 소리 하네요."
"당신은 몇 년째 일도 안 하고, 집안 돈은 전부 우혁 씨가 번 거잖아요. 그게 무슨 네가 가져갈 권리가 있어?"
"박우혁이란 사람도, 그의 돈도, 당신은 이제 아무것도 가질 수 없어."
역시나.
그녀가 진짜로 원하는 건 박우혁이 아니라 그의 돈이었다.
그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다면, 그녀가 과연 그 옆에 남아 있을까.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복도를 막 나서는 순간, 박우혁이 마주 섰다.
그의 첫마디는 다름 아닌, 차가운 추궁이었다.
"이소리, 왜 송유진 시켜서 하민아를 곤란하게 만든 거야?"
"예전엔 몰랐는데, 너 이렇게 속이 비뚤어진 사람이었어?"
"네가 이혼하겠다고 해서 내가 하민아 데리고 온 거잖아."
"게다가 바람피운 건 나고, 잘못한 것도 나야."
"화를 내도 나한테 내야지, 하민아는 아직 어린애야. 너랑 송유진이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얼마나 상처받겠어."
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비웃었다.
"나도 몰랐네. 네 머리가 그렇게 나빴을 줄은."
그때 하민아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박우혁을 보자마자 놀란 토끼처럼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고, 그 모습은 지극히 연약했다.
그녀는 억울한 듯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오빠, 나 괜찮아요. 조금 속상한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발 나 때문에 이소리 언니랑 싸우지 말아요… 제 탓이에요."
박우혁은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넌 늘 이렇게 착하지. 나 걱정부터 하고."
"이젠 더는 너 혼자 이런 일 겪게 안 할게."
하민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셔츠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떨어졌다.
박우혁은 그 눈물에 마음이 흔들린 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오빠한테 이런 말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눈앞의 이 연극 같은 광경이 더럽게 느껴졌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걸으며 송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진아, 오늘 네 생일파티 망쳐서 미안. 다음에 내가 온천 쏠게.]
식당 문을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은 드물고 달빛은 희미했다.
나는 문득 웃음이 났다.
박우혁이 곧 다시 빈털터리가 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었다.
하민아, 너 평생 부잣집 안주인 따위는 못 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