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그는 지친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이소리, 그땐 우리가 너무 어렸어. 그때의 설렘을 사랑으로 착각했을 뿐이야."
"하지만 이제 우린 서른이잖아."
"하민아를 만나고 나서야, 진짜 사랑이 뭔지 알게 됐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미쳐버릴 줄 알았다.
적어도 달려가 그의 옷깃을 붙잡고 욕이라도 하고, 뺨이라도 한 대 때릴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무도 차분했다.
눈물이 눈가에 맺혔지만, 끝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침대 머리맡에 놓인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둠 속에서 화면 불빛이 유난히 눈부셨다.
주변은 고요했고, 나는 수화기 너머로 끈적하면서도 애교 섞인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오빠, 집에 있을 땐 전화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밖에 천둥이 쳐서 너무 무서워…"
답답함이 가슴속에서 차올라 숨이 막혔다.
그런데 박우혁은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며 다정하게 달랬다.
"괜찮아, 나 이미 그녀한테 다 얘기했어."
"이불 덮고 얌전히 누워 있어. 오늘 밤은 내가 갈게."
새벽 두 시.
나는 그의 서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늘 중요한 고객과의 대화가 사라질까 봐 대화 기록을 백업해두는 습관이 있었다.
다행히도 잠금 비밀번호는 아직 딸 생일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휴대폰을 열고, 하민아와 주고받은 빽빽한 메시지를 보기 시작했다.
무려 26,893통이었다.
지난주, 하민아가 그에게 보냈다.
[오빠, 나 오늘 요리 여러 가지 했어. 처음으로 해본 건데, 오빠 위해서 배운 거야. 얼른 칭찬해줘.]
박우혁은 바로 답했다.
[민아야, 나를 위해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돼. 지금 그대로의 네가 가장 좋아.]
[난 네가 가진 그 순수함과 따뜻함이 좋아.]
하민아는 감동한 듯 울음 이모티콘을 보냈다.
[흑흑, 오빠, 이러면 나 진짜 버릇 나빠질지도 몰라.]
[내 여자는 내가 버릇 나쁘게 만들어도 돼.]
손이 떨렸다.
나는 기록을 위로, 계속해서 올려봤다.
지난달, 그러니까 나와 박우혁이 결혼 7주년을 맞은 바로 그날 오후, 그는 하민아와 잠자리를 가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좀 붉은 것 같아. 밤에 약 다시 발라, 알겠지? 착하지.]
하민아는 부끄러운 얼굴 이모티콘을 보냈다.
[알겠어요~ 잔소리꾼 오빠.]
[다 오빠 탓이야. 이제는 뒤로는 절대 안 해.]
[근데 오빠, 나한테 약속해줄 수 있어? 그 여자 다시는 안 만지겠다고… 오빠가 그녀랑 키스했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바보야, 오후 내내 여덟 번이나 했는데 내가 무쇠인 줄 알아?]
나는 오랫동안 화면을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2년 전, 그들이 처음 관계를 맺은 뒤의 대화를 찾았다.
그땐 하민아가 아직 그를 '오빠'라 부르지 않았다.
[박 대표님, 어젯밤 일은 제 의지였어요. 책임지지 않아도 돼요.]
[술이 너무 과해서 저를 끌어안고 키스하신 거 알아요. 괜찮아요. 당신을 한 번이라도 가질 수 있어서, 그걸로 충분해요.]
[그래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제 첫 남자예요.]
그때의 박우혁은 망설임이 많았다.
새벽 한참 뒤에야 답장이 왔다.
[그 정도 술로는 안 취해.]
[그건 내가 내 의지로 한 일이야.]
나는 속이 울렁거려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모든 대화 기록을 USB에 백업한 뒤, 의자에 몸을 웅크린 채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목구멍 깊숙이선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마음껏 울고 싶었지만, 옆방에서 딸이 자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가슴이 수천 개 조각에 베이는 듯 아팠다.
이렇게 오랜 세월, 나는 박우혁이 곁에 있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사람을 하루아침에 도려내야 한다니, 아프지 않다는 건 거짓이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