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반드시 그녀를 찾아 내!
황보재혁은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심우리는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적나라한 위협이 담긴 말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황보재혁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하루 종일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하다니. 애초에 서로 간섭하지 말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강제로 묶여 다녀야 한다니, 우리도 마음이 불편했다.
비록 뭐라 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처지는 참으로 난처했다.
아무 말 없이 대문 앞까지 걸어 나가자, 휠체어에 앉아 있던 재혁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전용차에 탔다. 심우리도 따라 차에 타려 했으나, 윤성이 그녀를 막아섰다.
“심 아가씨, 이건 저희 작은 도련님의 전용차량입니다.”
심우리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재혁은 고개를 돌려 냉철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넌 아직 천년이 지나도 내 비서가 되려면 멀었어!”
우리는 얼굴이 굳어지며 황보재혁에게 따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럴 거면 왜 큰 회장님과 약속했나요?”
재혁은 차가운 시선을 돌리며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윤성이 무표정하게 차 문을 닫으려 하자, 심우리는 황급히 손을 내밀어 막으며 말했다.
“당신이 가면 난 어떡해요? 할아버지께는 뭐라고 해요?”
‘할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황보재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화가 난 듯 그녀를 위험하게 노려보았다.
“...”
우리는 속으로 울컥했다. 세상에 이런 나쁜 자식이 있을 줄이야!
윤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심우리에게 회사를 가는 노선을 알려준 뒤 차갑게 차 문을 닫았다.
“심 아가씨, 행운을 빕니다.”
그 말을 남기고 차는 멀리 사라졌다.
흩날리는 바람 속에서, 우리는 대문 앞에 서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경비원은 그녀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그 눈길에 심우리는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
‘혼자서도 갈 수 있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주먹을 꽉 쥐었다.
* * *
차 안에서,
“도련님,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황보재혁은 깊게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럼 너도 같이 내릴래?”
윤성은 순간 얼굴이 굳어졌고, 재빨리 응답했다.
“방금 한 말 취소하겠습니다.”
재혁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차가운 시선으로 백미러를 통해 대문 앞에 서 있는 작고 아담한 그녀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딱 한 번만 힐끗 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고,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얇은 입술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찾으라고 했던 여자는 어떻게 됐어?”
그 말이 나오자 윤성은 약간 긴장하며 주먹을 쥐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도련님, 그 길엔 CCTV가 없었고, 그날 워낙 큰비가 내리고 날도 너무 어두워 지나가던 행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곧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재혁이 시키는 일이라면 척척 해내던 윤성이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좀처럼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역시나, 황보재혁은 차가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달만 더 시간을 줄게.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그 여자는 지금쯤 임신했을 거야.”
윤성은 깜짝 놀랐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도련님의 아이를 가졌다고?
이건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윤성은 얼굴이 심각해졌다.
“알겠습니다. 병원 쪽 동향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재혁은 눈을 감았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여자를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의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를 꼭 찾아야만 했다.
* * *
우리는 30분 동안 헤매고서야 겨우 황보 그룹에 도착했다.
비록 도착했으나, 누군가가 그녀를 막아서며 예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황보 그룹은 교울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했다. 교울의 경제 발전을 이끈 황보 그룹은 교울을 국내 최고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 그룹에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황보재혁 씨에게 연락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그의 비서입니다.”
카운터 직원은 그녀를 얕잡아 보듯 흘끗 보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회장님께서 비서가 필요 없다는 건 회사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이에요. 남자를 꼬시려면 잘 알아보고 하세요.”
그 말을 듣고 우리는 깜짝 놀랐다. 설마 황보재혁이 자신이 회사에 오더라도 들어가지 못하게 계획해 놓은 것인가?
“어서 가세요.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같은 직원 될 자격도 없으면서 무슨 회장 비서라는 거예요?”
카운터 직원의 눈빛은 더욱 차가웠고, 옆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그녀를 비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입고 온 거 좀 봐! 이런 차림으로 비서라고? 제대로 된 옷도 없나 보네. 지하상가에서 산 옷 아니야?”
“참 별 사람 다 보네.”
“안 가면 경비 부를 겁니다.”
그들의 조롱에 심우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아래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입은 치마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치마는 아무렇게나 지하상가를 지나가다가 산 옷이었다. 당시 그녀는 월급이 빠듯해서 매일 아껴 써야 했고,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행복하게 잘 살아왔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사람들한테 지적을 당하고 나니 갑자기 자신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았다.
“어유 얼른 가세요. 옷도 좀 갈아입고 예쁘게 꾸미고 다시 오세요~”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심우리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졌고, 그녀는 아래입술을 꽉 깨물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때, 멀리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심우리는 고개를 돌렸고, 따뜻한 눈빛을 가진 남자와 마주쳤다.
“부회장님!”
그는 다름 아닌 황보재혁의 형, 황보재영이었다.
우리는 그와의 만남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져 조금 당황했다.
재영은 그녀에게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혁이 찾으러 온 거에요?”
우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궁색한 모습을 보인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사람들이 자신을 속으로 무시하고 있을 것 같아 발끝까지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죄송해요, 저...”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자기도 모르게 사과했다.
“제가 회사에 폐를 끼친 것 같아요...”
“괜찮아요.”
재영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데리고 갈게요.”
“아!!!”
재영이 우리의 손을 잡자 주위에 있던 직원들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탄성을 질렀다.
몇몇 카운터 직원의 얼굴에서는 금세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들은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비웃었는데, 황보재영과 아는 사이였다니!
설마... 정말 회장님의 새 비서라도 되는 걸까?
* * *
엘리베이터에 탄 심우리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보니, 자신의 손이 아직도 황보재영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심장이 엇박자로 뛰는 것만 같았다. 급히 손을 빼고는 두 발짝 뒤로 물러나 그와 거리를 두었다.
재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잘생긴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는 몰래 그를 훑어보았다.
그의 피부는 매우 하얗고, 입체적인 이목구비에는 부드러운 눈썹이 돋보였으며, 적당한 두께의 입술은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흰 셔츠는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다.
어떻게 봐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가서 오른쪽 끝까지 가면 재혁이 사무실이 있어요. 제가 지금 다른 일이 있어서 함께 못 가줄 것 같은데, 혼자 찾을 수 있죠?”
재영의 말에 우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아주버님.”
“별말씀을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주변은 다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우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재영이 말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드디어 사무실 문이 보였다. 우리는 손을 뻗어 문을 열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문이 열리며 미확인 물체가 밀려 나오면서 그녀와 부딪혔다.
심우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녀와 함께 넘어져 있던 것은 짙은 화장을 하고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의 여자였다.
“야!!! 황보재혁,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심우리는 그제야 자신이 부딪힌 여자를 알아보았다. 그 여자는 빠르게 일어나더니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
심우리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형의 재혁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어두워졌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아우라가 주변을 압도했다.
그는 얇은 입술을 살짝 열고 차갑게 말했다.
“꺼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