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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날 속이면 어떤 꼴이 나는지

황리나는 갑자기 몸이 와락 떨렸다. 성준열이 무서웠다. 그 두려움은 성인이 된 뒤 처음 다시 마주쳤던 그날, 뼛속 깊이 박혀 버렸었다.

그날은 세인트 타워 신임 실행총괄 대표 취임식이었다. 회사에 막 들어온 인턴이었던 그녀는 맨 뒤에서 조용히 서 있다가, 사람들 사이로 들어오는 성준열을 보았다.

잘 맞는 검은 슈트에 단정한 흰 셔츠를 입은 그는, 그 차림 그대로 사람을 압도했다. 단상에 올라 짧게 인사한 뒤, 부패한 고위 간부들을 바로 해고하고 즉시 신고까지 해서 결국 감옥으로 보내 버렸다.

그는 일처리가 무서울 만큼 단호했다. 취임 후 회사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혔고, 모두가 잔뜩 긴장하며 지내던 시기였다.

직원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고, 그를 냉혈한이라고 불렀다.

황리나도 그랬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렇게 두려우면서도 자꾸만 그에게 끌렸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고, 아까 중정에서보다 훨씬 더 살벌해 보였다.

그녀는 눈을 떨구고, 한 치의 구김도 없는 그의 바지 핏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반대로 그녀는 언제나 제일 초라했다.

그런 차이가 그녀의 가슴을 더 짓눌렀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의 친절을 바라겠냐는 생각만 들었다.

"말해."

화낸 말투도 아닌데 남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는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힐 만큼 위압적이었다. 황리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에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문이 막혔다.

몇 년 전 유산했을 때 그녀는 과다출혈로 자궁을 크게 다쳤다. 이후 재검을 받으러 갔고, 의사는 다시 임신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재검 뒤 그에게 말하려던 순간, 분노에 휩싸인 성준열이 그녀를 강제로 덮쳤다.

그의 깊고 짙은 두 눈은 속을 전혀 읽을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황수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준열아, 리나가 생각 없이 한 말이야. 그냥 나 화나게 하려고 한 소리거든..."

"장모님."

성준열이 말을 단칼에 끊었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일단 병원 가서 검사부터 해볼게요. 일부러 거짓말한 건지 검사하면 바로 나오니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황리나의 손목을 꽉 잡고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황수경은 성준열이 화내는 모습을 처음 봤고, 불안해서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의 기세가 너무 매서워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황리나가 정말 임신을 못 한다면, 성씨 집안에서의 자리는 그대로 무너진다는 걸.

그녀가 딸 앞에서 아무리 강하게 굴어도 결국 딸이 있으니 누릴 수 있었던 힘이었다. 진짜 강한 사람을 만나면 숨죽이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오랜 세월 재경시의 유력가에서 배운 생존 방식이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성준열은 이미 멀찍이 걸어가고 있었다.

차 안에서 그는 황리나를 조수석에 거의 던지듯 앉히고, 사설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차 안은 숨 막히게 고요했고, 엔진 소리만 낮게 울렸다. 황리나는 그의 분노가 지금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가는 길에 그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병원까지 30분 남았어. 지금 말하면 덜 아프고, 끝까지 버티면 더 크게 돌아올 거야."

황리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밤빛에 잠긴 창문은 반들반들한 거울처럼 그녀의 불안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사실은 계속 그를 속였다고? 2년 반 동안 피임약을 먹였다고? 약에 알레르기 반응 올 때마다 참고 견딘 게 다 그 거짓말을 지키기 위한 값이었다고?

그날 그녀가 유산한 아이 얘기만 꺼냈을 뿐인데, 그는 미친 듯이 그녀를 덮쳤었다.

그때 그녀는 제대로 알았다. 그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 아이가 성준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자신은 그 아이를 품는 '그릇'일 뿐이었다는 걸.

그 그릇이 깨지면, 당연히 가치도 사라지는 거였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손등엔 선명하게 핏줄이 솟았다. 병원의 붉은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그녀가 끝까지 말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차렸다.

차는 "끼익" 소리를 내며 병원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리나를 조수석에서 확 끌어내렸다. 그녀의 턱을 움켜쥐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을 맞췄다.

"황리나. 날 속이면 어떤 꼴 나는지 알지."

황리나는 그의 두 눈을 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삼킬 듯했고, 그녀는 숨이 턱 막혀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이런 무기력한 반항에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한 발 물러났다.

"좋아.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그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병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사설 병원엔 필요한 장비가 모두 갖춰져 있었고, 산부인과 검사는 10분 만에 끝났다.

산부인과 과장실에서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기세가 공간 전체를 묵직하게 눌렀다.

과장은 잔뜩 긴장한 채 침을 삼키고 말했다.

"성준열 씨, 사모님은 지난 유산으로 자궁 내막이 많이 얇아졌고, 나팔관도 유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기간 피임약 복용으로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낮아... 임신이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는 차 안에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황리나의 몸 상태가 이렇게까지 나빠졌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었다.

과장이 조심스레 그를 보며 말을 잇기 전, 그의 목소리가 먼저 떨어졌다.

"제 아내가 이걸 언제 알았습니까?"

과장은 기록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2년 반 전입니다. 재검 받으러 오셨을 때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졌을 때, 그의 얼굴은 그대로 폭풍 전야처럼 굳어졌다.

2년 반 동안 그녀는 모든 걸 숨긴 거였다. 그동안 자신이 먹인 피임약을 떠올리면, 그는 그녀를 굴욕 준다고 여겼겠지만 지금 와선 스스로를 망친 꼴이었다.

그때 그녀는 도대체 그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그의 무지를 비웃었을까, 아니면 그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겼을까.

과장은 그의 얼굴이 점점 더새까매지는 걸 보고 망설이다가 말을 더 이었다.

"그리고... 방금 검사에서 확인됐는데, 사모님은 피임약 알레르기가 있으십니다."

그의 숨이 턱 막혔다. 그 말은 마치 강철 바늘이 목을 찌르는 듯했고, 둔한 통증에 눈앞이 아찔해지며 숨 쉬기도 힘들어졌다.

그 순간 창밖에선 "우르르릉—" 하는 천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리나는 병상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고, 위가 또다시 세게 뒤틀리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그는 모든 사실을 안 상태였다.

그는 자신을 어떻게 할까.

정말 이혼할까.

이혼이라는 말이 스치자 위가 움켜잡히듯 아파왔다. 사실 이혼이 나을지도 몰랐다. 더 이상 서로를 괴롭힐 필요가 없으니까.

두 사람 모두에게, 그게 해방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잘못된 결혼이었고, 지금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팠을까.

"쾅!"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고, 황리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들어온 남자는 천둥 같은 분노를 뒤집어쓴 채였고, 어둡고 잔혹한 눈빛은 마치 악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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