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혼은 없고, 사별만 있다
이틀 전 밤, 마을을 떠나올 때 할머니가 하신 말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할머니는 연로하셨고, 이마리는 더 이상 할머니 마음에 걱정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레 말을 마친 이마리는 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려 했다.
떠날 준비를 하려던 그때, 남자의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동의하죠. 지금 당장 혼인신고하러 갑시다."
그의 말에 이마리는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고연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한 가지는 미리 말해둘게요. 저는 이혼한 적은 없습니다.
단 한 번, 사별했을 뿐이에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자의 듬직한 그림자가 이마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에게는 묘한 신비감이 있었고, 어쩐지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중매인은 그가 작은 회사에 다니고, 현재 월급은 180만 원 정도지만 앞으로 승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마리는 그의 경제적 조건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상류 사회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평범한 사람과 결혼해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런 삶이 지금의 자신에게 더 잘 맞을지도 몰랐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마리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방금 들은 고연우의 말은 어딘가 강단 있고, 동시에 일방적으로 들렸다.
생각해보면, 이번 생에서 이마리가 한 가장 미친 짓은 처음 만난 맞선남에게 혼인신고를 제안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 미친 건, 그가 망설임 없이 "좋아요"라고 대답해버린 것이다.
"좋아요."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이마리는 목이 메었고 눈가도 시큰해졌다.
이게 바로 자신이 바라던 결과 아니었나?
누군가와 결혼해서 이씨 집안을 벗어나고, 그 남자에게서 완전히 떠나는 것.
할머니가 말했듯이, 그녀는 이미 스물여섯이었다.
언제까지 이씨 가문에 붙잡혀, 그 사람에게 휘둘리며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어차피 이씨 집안이 사랑한 건 오직 이나리 하나였고, 가족의 모든 자원과 관심도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 명목상 자신의 약혼자였던 강지석조차, 한 치의 예외 없이 이나리만을 감쌌다.
"가죠."
이마리는 그렇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마리는 멀리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빛이 순간 환해졌다.
"여기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우리 버스 타고 갈 수 있겠네요. 500원이면 된대요, 정말 싸죠?"
마지막 말을 하며 그녀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스스로 아낄 줄 아는 자신의 모습이 기특한 듯했다.
예전엔 누가 더 비싼 걸 사는지를 두고 경쟁했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누가 더 절약하는지를 두고 경쟁하는 세상이었다.
고연우는 태어나서 억 단위 이하의 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마리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자, 그의 눈빛은 묘하게 어두워졌다.
이렇게 사소한 일로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이 여자는 정말...
고연우는 조용히 차 열쇠를 꺼냈다. 렉서스였고, 그의 기준에선 매우 저렴한 차였다.
"제 차가 있긴 한데... 좀 오래됐어요."
이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차는 탈 수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고연우는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말씀하신 게 맞아요. 차는 그냥 이동 수단일 뿐이죠.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마리는 그의 웃는 눈을 마주치다가 괜스레 부끄러워져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좀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세요?"
고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마음이 아프네요."
그 말에 이마리의 가슴 한쪽이 찡하게 저려왔다.
만약 이씨 가문 사람들이었다면, 그녀에게 고급차를 탈 자격도 없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마리는 이씨 가문에 있을 때 마세라티, 마이바흐 같은 고급차들을 자주 봐왔지만,
그건 결국 현실이 아닌, 잠깐 스쳐 지나간 화려한 꿈 같은 것이었다.
그 환경에서 벗어난 지금, 그녀는 처음으로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더 이상 부모와 오빠의 실망 가득한 눈빛이나, 날선 짜증을 마주할 필요도 없었다.
고연우가 말했다.
"이제 동사무소로 갑시다."
동사무소에는 창구 옆에 한 손에 카메라를 든 직원이 서 있었다.
혼인신고를 하러 온 예비 부부를 대상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신부님, 이쪽 보고 웃어주세요!”
아직은 조금 어색했지만, 이마리는 최선을 다해 미소를 지으며 고연우 쪽으로 다가갔다.
고연우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금테 안경을 벗으면, 그 선명한 인상이 한층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는 흰 셔츠로 갈아입고 나타났고, 그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차갑고 절제되어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은근한 욕망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겉으론 단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방탕한 기운이 감돌았다.
혼인 신고 후 서류를 받은 순간, 고연우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부인,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마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
마음속에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움과 낯섦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시장에 들러서 장 좀 보고, 집에서 요리해요."
오늘은 혼인신고를 한 첫날이었다.
기왕이면 맛있는 걸 먹으며 조촐하게나마 축하하고 싶었다.
밖의 고급 식당은 너무 비쌌고, 차라리 신선한 재료를 사다가 함께 요리하는 편이 훨씬 좋았다.
고연우는 이마리의 제안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차 가져올게요."
"네."
이마리는 길가에 조용히 서서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
고연우가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화면을 힐끗 보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표시된 번호는 수도권 지역의 번호였다.
전화를 받기 전, 그는 이마리를 슬쩍 돌아봤다.
하지만 이마리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연우는 틈을 타 전화를 받으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소시혁, 내가 말했지. 별일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고. 지금 아내랑 장 보러 가는 중이니까, 너희들 챙길 여유 없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에 차 있었다.
"아이고 우리 형님, 혹시 지금 역할에 너무 몰입하신 거 아닙니까? 진짜로 은화성 여자랑 번개팅, 아니 번개 결혼까지 하신 겁니까? 박주현 말로는 요즘 특.별.히 폐차 직전 렉서스를 타고 다닌다던데요.
쯧쯧, 진짜 존경스럽다.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낡은 차를 구했대? 거의 골동품 아니야?
이러다 다음엔 자전거 타고 출근하시겠어요. 그럼 내가 진짜 무릎 꿇고 경배 드릴지도~"
고연우: "..."
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시끄러워."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소시혁은 오히려 더 흥분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와우… 그리고, 장을 보러 가신다고?
진짜 연기력 미쳤네. 우리 연우 도련님 파랑 마늘은 구분이나 할 줄 아세요?
진짜 대단하시다. 어디까지 해볼 건지, 두고 볼게!"
정작 고연우의 어머니, 박 여사님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수도에서 1년 넘게 자취를 감췄던 그녀의 아들이 지금 은화성에 내려와, 폐차 직전의 낡은 렉서스를 몰며 회사 사원으로 위장한 채, 낯선 여자와 번개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극한 체험’이었다.
소시혁은 문득 궁금했다.
혹시 사람 사이의 관계도 서로가 낯설수록 더 자극적이고 더 재미있는 걸까?
고연우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깊은 눈빛으로 이마리를 바라보다 천천히 말했다.
"파랑 마늘은 구분 못 해도, 내 아내는 구분할 수 있어. 넌 이해 못 하겠지만, 이건 우리 부부만의 취향이거든."
그리고 덧붙였다.
"너 같은 솔로는 아마 평생 모를 거다."
음, 소시혁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그의 새 신부는 자신이 작은 회사 직원이라 믿고 있었고, 다음번엔 정말 자전거라도 타고 나가면 더 리얼한 생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연우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한 이 아내에게 묘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평범한 ‘가짜 삶’이 점점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
소시혁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멈칫했다.
마지막 단 한 마디에 완전히 기가 꺾인 소시혁은 결국 우울하게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고연우와 이마리는 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은 왁자지껄했고, 온통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했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분위기였지만, 묘하게 활기찼다.
하지만 고연우는 그런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양복 차림에 키가 크고 단정한 외모. 그는 이 시장 한복판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온 시장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따라붙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