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
병원 원장이 환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왔다. 원장은 장시원을 스쳐 지나 강용준과 임지수에게 곧장 다가갔다.
"사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 도련님은 제가 우리 병원 전문의들을 모아 직접 회진했어요.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요. 며칠만 쉬면 퇴원할 수 있어요."
잘못 짚었다는 걸 느꼈는지 임지수의 볼이 붉어졌지만 바로잡지 않았다. 강용준이 냉랭하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장시원이 먼저 나섰다.
"원장님, 제가 희준이 엄마예요."
장시원은 스스로를 '사모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서 강용준과 남남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원장은 운동복 차림의 장시원을 훑어보고, 다시 명품으로 단정한 임지수를 보더니 퍼뜩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사모님! 아드님은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임지수는 속눈썹을 떨구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속으로 씁쓸함이 맴돌았다.
"희준이는 왜 천식이 도졌나요?"
장시원이 단정히 물었다.
"작은 도련님은 폐가 약하고 선천성 천식이 있어요. 평소 식단에 특히 주의해야 해요. 견과류나 해산물은 심한 발작을 일으켜요. 다행히 이번엔 처치가 빨라서 더 커지지 않았어요."
강용준은 창백한 강희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집에서는 식단을 엄격히 관리해요. 견과류도 해산물도 손 못 대게 했고, 학교에도 다 당부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걸 먹은 거죠?"
강용준의 차가운 시선이 장시원을 향했다.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아."
장시원의 눈빛이 칼날처럼 임지수에게 옮겨 갔다.
"강씨 집안 사람이라면 다 알아. 희준이는 집에서 이런 걸 먹을 일이 없어요. 학교 가기 전에 누구를 만났는지만 확인하면 원인은 바로 나와."
임지수는 강희준을 더 꽉 끌어안았다. 심장이 북을 치듯 뛰었다.
"희준아, 뭐 먹었어? 누가 준 거야?"
장시원은 눈을 맞추고 또렷이 물었다.
강희준은 태어난 순간부터 강씨 그룹의 당연한 후계자였다. 엄하게 길러야 했지만 강용준은 늘 바쁘다는 이유로 부재했고, 강 부인은 손자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그래서 강씨 집안 모두가 강희준을 왕처럼 모셨다. 그 결과 강희준은 어려서부터 버릇이 제멋대로였고, 장시원의 애씀은 '잔소리'로 취급되었다.
"희준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강용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강희준은 검은 눈동자를 굴리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말할 수 없었다. 학교로 가는 길에 임지수가 사 준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말하면 임지수가 강용준에게 혼날 것이고, 임지수는 자신에게 늘 잘해 주었다.
"진... 진 기사 아저씨요!"
강희준은 성급히 내뱉었고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이스크림은 제가 사 달라고 했어요. 그냥 먹고 싶었어요. 안에 견과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임지수는 강희준의 손을 다독일 뿐, 말을 아꼈다.
강용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진 기사 아저씨?"
진 기사는 강씨 집안에서 20년을 운전해 온 사람이다. 성실하고 무던했고, 집안 사정은 진 기사와 남 집사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시원은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강희준을 바라봤다. 속이 잔잔히 저렸다. 장시원은 강희준에게 항상 정직하라고 가르쳐 왔고, 어떤 일이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알려 왔다. 강희준은 기억을 갖기 시작한 뒤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거짓을 말했다. 그것도 임지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진 기사님."
장시원의 눈가가 붉어졌다.
"예, 사모님."
복도에서 대기하던 진 기사가 병실로 들어와 강용준에게도 허리를 굽혔다.
"도련님."
강희준은 움찔하며 어깨를 오므렸다.
강용준이 놀란 눈으로 장시원을 보았다.
"진 기사는 왜 불렀어?"
장시원은 강용준의 굳은 얼굴을 흘려보내듯 넘기고 차분히 물었다.
"진 기사님, 희준이 학교 가는 길에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고 했어요. 기사님이 사 주셨다고 하는데 사실이에요?"
진 기나는 두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사모님. 사모님 허락 없이 제가 어떻게 그런 걸 드리겠어요. 사실 그 아이스크림은..."
"저... 저예요."
끝내 임지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강용준의 눈이 커졌다. 임지수의 울먹이는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강희준은 얼른 임지수의 손을 꽉 잡았다.
"지수 이모, 이모 잘못 아니에요!"
"오빠, 내 잘못이야..."
임지수의 콧날이 금세 붉어지고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희준이가 길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그렇게 바라보는데... 마음이 약해져서 내가 사 줬어. 견과 알레르기인 줄 정말 몰랐어 오빠, 전부 내 탓이야. 미안해..."
강용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네가 희준이 사정을 몰랐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다음부터 조심해."
눈물 고인 얼굴을 들며 임지수가 그를 올려다봤다.
"오빠..."
강희준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다행이에요! 아빠는 지수 이모 제일 좋아하잖아요!"
강용준은 표정 없이 침묵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장시원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 속이 뒤집혔다.
장시원은 예전 한 장면을 떠올렸다. 커피를 들고 서재에 들어갔던 날이었다. 장시원은 강용준이 서류를 검토하는 걸 방해하지 않으려고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다가가 조용히 컵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강용준이 프로젝트 문제로 예민해져 있어 손을 홱 젖히는 바람에 커피가 책상에 와르르 쏟아졌다.
"누가 이런 쓸데없는 걸 하래? 나가."
잘못은 강용준에게 있었지만, 화살은 죄다 장시원에게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장시원은 컵을 씻으며 오래 울었다.
지금 임지수 앞에서 강용준은 다정했고, 인내심이 있었고, 너그러웠다. 방금 전 강희준을 위험에 빠뜨렸던 사람이 누구인지도 잊은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이렇게 분명했다.
장시원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더 머무르면 자신의 눈을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오빠, 언니가 많이 속상해 보여... 내가 가 볼게."
임지수가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섰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장시원은 무릎이 욱신거리고 몸에 힘이 빠지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언니."
임지수가 비릿한 웃음을 띠며 불러 세웠다.
"언니, 왜 그렇게 급하게 가? 남들이 보면 오빠랑 사이가 많이 틀어진 것처럼 보이겠네."
"임지수,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워?"
장시원은 차갑게 바라봤다.
"다섯 살짜리 아이를 시켜서 널 위해 거짓말하게 만들었지. 마음은 남의 남편하고 남의 아이에게만 가 있지. 아는 사람은 네가 아이비리그 컴퓨터공학과 출신이라는 건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널 유흥업소 출신으로 보겠네."
입끝에 더 거친 말이 맴돌았지만 장시원은 병원 복도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임지수처럼 남의 것을 빼앗고도 뻔뻔하게 고개 들 사람은 아니었다.
임지수는 손가락을 꽉 쥐고 입꼬리를 올렸다.
"왜 이렇게 몰아붙여? 강희준이 거짓말한 건 엄마인 언니가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야. 그게 왜 내 탓이야? 아이는 백지야. 언니가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달라져. 언니는 말과 행동을 조심했어야 해."
"허... 결혼도 안 해 본 네가, 나한테 육아를 가르치겠다고?"
장시원은 비웃음을 흘렸다.
"낳아 보지도 않았는데 잔소리는 많네. 그 말버릇이면 네 오빠도 질리겠다."
임지수의 입가가 씰룩했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장시원은 더 말 섞을 마음이 없었다. 돌아서려는 순간, 억울함에 들끓던 임지수가 장시원의 팔을 확 잡아챘다.
장시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임지수가 잡은 곳은 칩을 구하려다 다친 자리였고,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
"놔."
장시원은 이를 악물고 팔을 뿌리쳤다.
"꺄아...!"
임지수의 비명이 복도를 울렸다. 그녀의 몸이 뒤로 확 젖혀졌지만 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강용준이 어느새 다가와 두 팔로 임지수를 단단히 받아 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