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망나니 아버지의 전화, 일단 한탕 뜯기
심하영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할머니'.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심하영은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할머니 손에서 자라 둘은 늘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말 그대로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전생의 그해 여름, 시골에서 혼자 지내던 할머니가 발을 헛디뎌 연못에 빠졌다.
퇴근 후 옛집 CCTV를 확인했을 때, 할머니는 이미 싸늘하게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때 최서휘가 처음부터 끝까지 장례를 함께 치러주고 성대하게 모셔드렸고, 그 일로 심하영은 그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었다.
심하영은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입을 떼기도 전에, 익숙하고 힘찬 목소리가 울려왔다.
"영아, 점심 먹었니?"
'영이'는 어릴 적 할머니만 쓰던 애칭이었다.
다시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목소리에, 심하영은 숨을 들이키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
목이 메인 손녀의 소리에, 할머니는 2초 정도 말을 멈추더니 바로 걱정부터 쏟아냈다.
"이것 봐라. 네 부모가 또 너 서럽게 했냐, 아니면 최씨 집 그 애가 너를 귀찮게 했어?"
"그냥…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심하영은 신발을 벗고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채,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가 해주신 생선 조림 먹고 싶어요. 내일 시골로 내려갈게요. 괜찮죠?"
"넌 일하느라 바쁘잖니. 내가 도시로 우리 손녀 보러 가마!"
할머니는 벌써 마음이 정해진 듯 말했다.
"마침 뒤뜰에 죽순이 올라왔길래 좀 캐놨다. 요 며칠 비가 와서 산에 버섯도 많이 났더라…"
할머니의 잔소리 같은 일상적인 말투가 귀에 닿자, 심하영은 팔뚝을 세게 깨물며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네… 그럼 내일 고속철역까지 마중 갈게요."
"그럴 것 없다. 내가 기차 내려서 지하철 타고 네 집으로 갈게. 길 다 알지…"
할머니는 뒤뜰에 죽순 캐러 가야 한다며 금세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생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해 함께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78세라 해도 몸은 아직 건강했다. 그 재난만 피하면 10년, 아니 그 이상도 거뜬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샤워를 마친 뒤, 라면을 끓여 먹던 참에 심광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인사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하영아, 오늘 저녁 네 할머니 생신이다. 절대 빠지지 마라. 서휘한테 시간 되는지 물어보고 같이 와라."
심씨 집안 할머니의 생신이었다.
심씨 집안의 이 할머니는 조씨 성을 가진 조선옥이었다.
젊은 시절 출세에 눈이 멀었던 심진호는 첫 아내를 버리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부잣집 규수인 조선옥과 재혼했다.
조선옥은 누군가의 가정을 빼앗은 제3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심광섭은 부유한 새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친어머니를 철저히 외면했고, 그 점에서 아버지 심진호와 다르지 않았다.
심하영은 할머니가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뒤, 심광섭이 장례식에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은 그 냉혹함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불쌍한 할머니의 장례식에는 상주 역할을 맡을 사람도 없었고, 그 일을 계기로 심하영은 일방적으로 심씨 집안과 인연을 끊었다.
라면을 후루룩 크게 한입 넘기며, 심하영은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는 시골에서 버섯 따고 계시는데요."
"하영아,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려는 거냐!"
심광섭은 목소리를 세우며 말했다.
"네 할머니 생신인데 삼촌들 아이들도 다 올 거야. 네가 안 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야."
심하영은 계속 국수를 먹으며 대충 둘러댔다.
"방금 병원에서 나왔어요. 좀 몸이 안 좋아서…"
"소처럼 튼튼한 네가 무슨!"
심광섭은 짜증을 숨기지도 않고 말을 끊었다.
"나를 속이려면 말이 되는 핑계를 대야지."
심하영은 손등에 남은 주사 자국을 바라봤다.
피부가 살짝 붉어진 자국을 보며, 눈가가 잠시 뜨거워졌다.
"최근 회사 차렸잖아요. 일도 많고요. 오늘 저녁에도 야근하면서 설계도 작업해야 해요."
심하영은 졸업 후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고, 실제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심광섭은 즉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얼마면 되냐?"
심하영은 금액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답했다.
"아버지 체면이랑 할머니 기분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에 달렸죠."
말을 끝내자마자, 심하영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 알림이 울렸다.
[1억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와 시골에서 살 때, 심광섭은 1년 내내 할머니에게 이백만 원만 보냈다.
그 이백만 원이 그녀와 할머니 두 사람이 한 해 동안 생활해야 할 전부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조선옥의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애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주지 않은 쓰레기 같은 아버지였으니, 심하영은 그런 사람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입금 확인 후, 심하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OK 이모티콘을 보내고 그릇을 챙겨 부엌으로 들어갔다.
막 설거지를 끝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최서휘의 이름이 화면에 뜨는 순간, 심하영의 심장은 반사적으로 움찔했고 전생에서 쌓였던 증오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부엌 조리대에 몸을 기대며 가슴을 꾹 눌러 진정을 시도했다. 마음속의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하영아."
최서휘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감정의 결을 잘 숨긴, 온화하고 맑은 톤이었다. 명문가 귀공자다운 절도 있는 어조.
"아저씨한테 얘기 듣고 알았어. 오늘 저녁이 조선옥 할머니 칠순 잔치라더라. 할머니께서 예술품 수집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장하민 작가의 '장수백학도'를 사람 통해 구했어."
"괜찮을까?"
"장하민 작가의 작품?"
심하영은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신이 골랐다면, 좋아하시겠지."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진호가 한창 바람을 피우던 시절, 상대가 바로 자수장(刺繡匠) 장하민이었다는 것을.
임신 말기였던 조선옥이 차 안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고, 충격과 분노로 조산까지 겪었다.
조산한 아이는 딸이었고, 그 아이의 죽음은 조선옥의 평생 한이었다.
늘 딸을 원했던 그녀에게, 장하민은 가장 잔인한 이름이었다.
즉, 최서휘의 이 선물은 조선옥의 상처를 정확하게, 그것도 칼끝처럼 날카롭게 건드리는 선택이었다.
심하영은 전생에서도 그가 동일한 선물을 준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심광섭 부자에게 아직 마지막 기대를 품고 있었고, 최서휘가 좋은 인상을 남기길 바라며 선물을 바꾸라고 조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웃음만 나왔다.
심광섭과 최서휘가 선물 문제로 싸움이라도 벌이면 속이 다 시원할 지경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최서휘가 다시 물었다.
"지금 스튜디오야? 나중에 내가 거기로 가서 데리러 갈게. 같이 가자."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 있어요. 퇴근하고 우리 아파트로 와서 나 좀 데리고 가줘요."
심하영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곧바로 긴장으로 굳어졌다.
"어디가 안 좋은데? 지금 병원으로 갈까? 같이 검사받자."
예전에는 이런 말들이 그녀에게 축복처럼 들렸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자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흥, 그의 '걱정'은 결국 진나온을 위한 집착과 다르지 않았다.
심하영의 몸 상태 하나하나가 결국 진나온이라는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의 건강을 챙기는 모습은, 곧 진나온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었다.
심하영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정말이지, 재수 없게도 이런 개 같은 남자를 만나 평생을 망칠 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