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공우진에게 보내는 SOS
도씨 집안을 언급할 때 김비서의 어조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약간 불안한듯 앞에 곧게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스케줄에 관해서 만약 회장님께서 가실 의향이 없으시면 스케줄이 바쁘다는 핑계로 제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러 명의 긴장한 눈길 속에서 그는 눈초리를 내리깔더니 눈에 한 층의 싸늘한 막이 씌워졌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이미 한참이나 울려대던 핸드폰을 꺼냈다.
이 낯선 번호는 회의가 시작돼서부터 끝날 때까지 한 시간에 한 번씩 걸려왔었다.
“여보세요.”
담담하고도 차가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따라 강태리의 귀로 전해졌다.
지금 이 시각, 그녀는 난잡한 길거리에 앉아 있었다. 어지러운 배경음악은 연약한 목소리가 막연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감정을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지게 했다.
“여보세요, 공 회장님. 저 강태리예요. 그때 하셨던 말씀 진짜인가요?”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녀는 총 4통의 전화를 걸었다. 공우진이 진작에 잊고 있었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그 유설과 꼭 닮았던 눈이 떠올랐다.
공우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소 보내, 너를 데리러 사람이 갈 거야.”
통화가 끊나자 뒤에서 따라오던 김비서는 숨죽이고 그가 지시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공우진이 얼굴을 돌리자 남성미 가득한 턱라인이 빳빳하게 당겨졌다.
“스케줄 미룰 필요 없어. 그리고 사람 보내서 강태리를 데리고 와.”
그의 말이 끝나자 김비서 손에 들려있던 아이패드에 기다란 주소가 한 줄 떴다. 그것을 본 김비서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강태리? 강씨 아가씨요?”
그 틈만 나면 언니를 모해해서 실검에까지 오른 강씨 집안 가짜 아가씨?
강씨 집안에서 연을 끊고 난리 났을 때 공 회장님이 친히 경찰서에 가서 사람을 꺼내오던 기억이 아직도 김비서 눈에 생생하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유를 말하자면 김비서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여자의 사진만 보아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얼굴의 두 눈은 유설과 아주 판박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씨 집안의 그분은 이미 도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었고, 공 회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자기의 보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것을 보고 김비서는 계속해서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공우진의 발길이 조금 느려지면서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샤인 주택.”
“네.”
길가에서 컵라면을 들고 맛있게 먹고 있던 강태리가 갑자기 시스템66의 입금 알림과 진도 푸시 알림을 받았다.
“카카오뱅크 입금 2천만 원, 공우진 호감도 1%.”
“켁.” 매운맛의 라면에 사레 걸려서 하마터면 숨넘어갈 뻔했다. 찔끔 눈물도 새어 나왔다. 그전에 사건들 덕분에 강태리는 지금 유명인사가 되었다. 또 지금의 눈물 글썽이는 모습은 몇몇 인터넷을 자주 하는 행인들의 눈에 포착되었고 다들 핸드폰을 꺼내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강태리는 코를 풀적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은행 카드의 잔고는 여전히 몇십만원밖에 없었다.
“방금 2천만 원이 내 진짜 세계의 돈이야? 왜 갑자기 입금된 거야?” 강태리는 조금 목소리가 떨리면서 물었다.
시스템66, “숙주님의 통화로 공우진과 연락이 닿아 대역의 스토리 전개를 추진했습니다. 판정 결과 보너스 2천만 원을 획득한 거고요”
강태리는 한참을 멍 때리다가 곧바로 흥분하면서 컵라면을 몇 입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요타 알파드 하이브리드 고급 미니밴 한대가 그녀의 앞에서 서서히 정차했다. 기사님이 좌우를 살피더니 마지막에 시선은 버스역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던 여자의 몸에서 멈췄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수화기 넘어의 사람한테 말했다.
“강씨 아가씨를 찾았습니다. 다만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김비서가 무심결에 물었다. “왜요? 안 가겠대요?”
“아, 아뇨. 지금 컵라면을 드시고 계십니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입니다.”
차 안이 너무 조용했던 터라 스피커폰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서를 보고 있던 공우진이 고개를 살짝 틀어 김비서의 의아한 얼굴을 보고는 잠깐 고민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세프도 한 명 붙여줘.”
아마 공우진도 강씨 집안에서 그렇게 매정할 거라곤 생각을 못 한듯하다. 병원에서 바뀐 여자 아이가 지금 길거리에 나앉아 컵라면을 먹는 신세라니, 이게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 그한테 도움 요청한 이유인가?
강태리는 아직 주인공 대역에 대한 자각성이 없다. 남주가 스토리를 자기 앞에까지 추진한것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녀가 굶주렸던 배를 다 채우고 나서야 자기 앞에 있는 차량이 이미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일어나서 컵라면 사발을 버리는데 기사님이 차에서 내렸다.
“공 회장님께서 강 아가씨를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공우진 역시 속도가 빠르다! 진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리러 왔다.
강태리는 마음속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올랐다.
28살의 공우진은 공씨 그룹의 1인자다. 금융을 포함한 투자, 정권, 의약, 엔터테인먼트 등 분야에 발 담그고 있다. 최근에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으며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다. 그는 한양구의 패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남자다.
지금은 휘황한 성과를 이룩한 공우진이지만, 그에게도 예전에 힘든 시절이 있었다.
공우진이 26살이 되던 해, 공씨는 상장회사가 된지 얼마 안된 벤처캐피탈 회사였다. 공우진도 단지 회사의 미래 계승자일 뿐이었고 집안이 서로 대등한 유씨 집안 장녀 유설과 좋은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이 투자에 실패하고 자금줄이 끊기면서 하루아침에 파산당했다. 그것 때문에 그 인연도 자연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유설은 공우진을 사랑했지만 발언권이 없었던터라 같은 해 핍박에 못이겨 도씨 장남 도율과 혼인을 맺게 되었다.
근데 누구도 예상 못했던건, 2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에 공우진은 빼어난 능력과 강단성 있는 수단들로 갖은 위기들을 기회로 만들고 기존의 국면을 반전시켜 마지막엔 모든것을 삼켜버린 거물로 거듭났다.
도씨와 공씨는 줄곧 서로 돕고 합작하는 관계였다. 근래에도 많은 신흥세력이 부흥했지만, 강태리가 생각했을때에는 그 가운데 공씨가 도씨에게 암암리에 도움을 많이 줬을 것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아무래도 유설 때문에 공우진이 손을 내밀어 도와준게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은 서로 정이 있지만 신분 때문에 헤어져야만 했다. 근데 그둘이 재결합 하는 포인트도 참 특이했다. 남편인 도율이라는 사람은 올해 28살인데 몸이 워낙에 허약해서 명은 30살을 넘기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강태리가 공우진 곁에서 2년만 버티고 고분고분 자기의 역할인 유설의 대역만 잘하면서 공우진과의 호감도를 만렙으로 쌓으면 된다. 그러다가 유설이 과부가 되면 강태리는 돈을 받고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뭔가 어려울것 같진 않은데? 내가 그냥 조용히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 강태리가 소곤소곤 중얼거렸다.
“공우진한테 무슨 다른 ‘재벌병’ 같은 거 있어? 보통 소설 설정에서 그런 재벌 회장님들은 잘생기고 능력 좋은데 운명이 기구하잖아. 10명에서 5명은 다리가 병.신이 되고 3명은 가짜로 얼굴이 망가지고 2명은 위병이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야맹증이 있고 그러잖아.”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무슨 여주만 터치할 수 있는 그런 결벽증 같은 게 있으면 골치 아픈데.”
시스템66이 감탄했다. “숙주님 아는게 많네요? 첫 출근부터 힘들 걸 예상해서 제가 선발한 착란 세계 남주들은 다 엄청 깨끗해요. 근데 공우진한테 심한 위병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술 자리 접대 한번 할 때마다 한 번씩 발작하는데 보통은 공우진 혼자 침대에서 고통이 가셔질 때까지 참아요.”
강태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핸드폰을 꺼내 공우진의 사진을 검색해 보았다. 기억 속의 그의 얼굴은 무척 희미했기 때문이다.
화면 속에 욕망을 부르는 몸매며 깨끗하면서도 남자답게 잘생긴 비주얼을 보자 강태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러면서 엄청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나 이 사람이랑 자도 돼? 대역이라면 이런 고비쯤은 넘어야 하지 않겠어?”
시스템66이 잠시 침묵했다. “이론적으로는 되는데요, 근데 숙주님은 할 수 없을걸요? 남주들의 몸은 보통 여주만을 위해 남겨두는 거라서요, 게다가 보통은 재회하는 결말에 발생하거든요.”
“쩝.”
66과 수다를 떠는 사이 고급 밴은 샤인 주택으로 들어섰다.
한양구 최고 화려한 부자 동네, 한 채 별장의 시가만 해도 몇백억은 되었다. 근데 이런 별장이 단지 공우진이 여자를 키우는 곳에 불과했다.
강태리의 기억 속에는 그날 밤 그 남자가 자기를 경찰서에서 꺼내줄 때 명함 말고도 한마디 말을 했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