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함께 출장을 가다
퇴근 후, 강은채는 아이들을 데리러 유치원에 갔다. 원래는 윤지민을 같이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송세희가 윤지민을 데리러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엄마...”
지민은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세희를 향해 엄마라고 말한 후, 은채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민아, 엄마가 널 데리러 와서 기쁘지?”
세희는 가식적으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 지민은 더욱 겁에 질렸다.
“엄마...”
지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왜냐하면 오직 그만이 엄마의 눈에 어린 잔인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세희 씨, 아이가 우리 집에 가서 같이 놀게 하는 게 어때요? 불안하다면 같이 우리 집으로 가도 좋아요.”
은채는 지민을 도와주기 위해 먼저 부드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증오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은채 씨 불편하실 것 같은데 괜찮아요. 은채 씨는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하실 텐데, 아이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송세희는 가식적인 말투로 말한 후, 몸을 숙여 지유를 바라봤다.
“어머, 아이가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넌 이름이 뭐야?”
“안녕하세요, 아줌마. 제 이름은 강지유에요.”
지유는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민 오빠가 세희를 두려워하자, 자신도 저 아줌마가 두려워졌다. 그녀는 이 아줌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지유? 엄마 성을 따랐니? 아빠는? 왜 아빠 성을 따르지 않았니?”
세희가 의아하게 물었다.
“어린아이는 그런 걸 잘 몰라요. 송 여사님, 지민이가 우리 집에 가는 게 불편하시다면, 저희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은채는 한발 물러났다. 송세희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너무 강하게 나가면 세희가 지민에게 화풀이할까 봐 걱정이 됐다.
지민은 지유와 은채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고, 은채는 지민의 놀란 표정에 마음이 아파왔다.
다음 날, 은채는 갑작스런 출장 통지를 받았는데 심지어 윤재욱과 함께 가는 출장이었다.
은채는 매우 황당했다. 이미 퇴사한 직원이 왜 출장까지 따라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윤재욱의 사무실로 갔다.
“윤 대표님, 출장은 다른 사람을 보내시죠. 저는 이미 퇴사했으니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은채는 재욱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걸 보고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말을 꺼냈다.
윤재욱과 단둘이 출장을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은채는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지민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출장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업무 때문에 출장을 가는 거야. 너를 대신할 사람은 없어.”
재욱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차갑게 대답했다.
은채가 거절할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찾아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 아니면 회사 분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출장 가시면 되겠네요.”
은채는 계속 핑계를 찾고 있었다.
“MT 측에선 사람을 보내지 않을 거야. 너는 계속 우리 회사에서 일하게 될 거고.”
재욱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바로 오늘 아침, 그는 강은채가 다시 출근할 수 있도록 이미 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은채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욱은 말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은채를 노려봤다.
“윤 대표님, 저는 사람이지, 당신의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요. 전 이미 MT와 계약을 해지했으니, 아무도 저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겨우 업무 계약에서 벗어난 건데 은채는 다시 재욱의 덫에 빠질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디에서 일하든, 오롯이 그녀가 결정하는 거였다. 재욱은 그녀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강은채…”
재욱이 막 화를 내려는 순간, 회사 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가 나 통화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윤 대표님, 공항으로 가실 시간입니다.”
배원영의 스케줄 알림을 듣고는, 재욱은 전화를 끊었다.
“업무에 관한 일은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지. 오늘 출장은 네가 무조건 가야 해. 이 일은 아직 네 업무에 속하니 맡은 바 일은 끝까지 책임져야지.”
재욱은 화를 억누르며 말을 했다. 지금은 업무가 가장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럼 가겠습니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은채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시간도 촉박했기에 우선 그와 타협하기로 했다.
“말해.”
“지민이를 우리 집에 보내서 지유와 함께 놀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지유가 저를 그리워할 거예요. 제 친구가 아이들을 돌볼 겁니다.”
“지민이는 걔 엄마가 돌볼 거야.”
재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은채 외에는 그 누구도 지민이를 잘 돌볼 수 없다고 믿고 있긴 했다.
“그렇다면 이번 출장 거절하겠습니다.”
은채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재욱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김 집사한테 지민이를 너희 집으로 보내라고 말해놓지.”
재욱의 눈에는 분명히 분노가 가득 차 있었지만, 은채는 그가 어찌 됐든 그녀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출장은 급히 나가야 했기 때문에 은채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재욱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권혁수와 배원영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은채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등석을 예약했는데, 배치된 좌석을 보자 재욱은 짜증을 냈지만, 은채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재욱은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그의 오른쪽에는 원영이 앉았고, 원영의 오른쪽에는 권혁수가 있었고, 그 옆 통로 건너편 창가 자리에 은채가 앉았다. 즉, 은채는 재욱과 전혀 마주칠 일이 없었고, 서로 눈길 한번 마주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재욱의 얼굴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반면, 은채는 창밖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다행히도 재욱 옆에 앉지 않아서 이 가는 길 내내 어색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강은채가 만족해하며 창밖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채야…”
이시훈은 은채의 옆모습만 보고선 확신을 가지지 못해 이름을 살짝 불러보았다.
강은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시훈?"
설마... 조금 전에 가까스로 재욱을 피해 앉았는데, 이번에는 이시훈까지 나타나다니. 은채의 속이 또다시 착잡해졌다. 자신이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단 말인가.
"은채야, 진짜 너구나."
시훈은 흥분된 표정으로 은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우연의 일치였지, 절대 스토킹한 게 아니었다.
"사적인 일이야, 아니면 공적인 일이야?"
시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적인 일이야. 회사 동료들과 함께 출장 중이거든."
은채는 옆자리를 가리켰고, 이시훈은 그제야 몸을 돌려 재욱을 보게 되었다.
이때, 재욱의 얼굴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렸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예전의 재욱은 그래도 시훈에 대해 좋은 인상을 조금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시훈이 가장 싫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특히 그가 "은채야"라고 부를 때마다 더욱 화가 치밀었다.
"윤 대표님도 여기 계셨네요."
시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재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을 은채에게 보냈다. 하지만 은채는 재욱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지유는 어쩌고? 출장 가 있는 동안 돌봐주는 사람은 있어?"
시훈은 재욱의 분노 어린 시선을 개의치 않아 하며 다시 은채를 향해 말을 건넸다.
"수연이가 돌봐주고 있어."
은채는 여전히 시훈과 재욱을 쳐다보지 않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은채야, 바쁘면 다음엔 내가 지유를 돌봐줄게."
시훈은 계속해서 은채를 다정하게 대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는 태도였다.
"고마워."
은채는 웃으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유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시훈에게 부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예전에 그에게 받은 상처를 떠올리면, 그에게 다시 기대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이시훈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은채에게 혼란을 안겨주었다. 손바닥 뒤집듯 너무 빨리 딴판으로 변해버려, 은채는 그 이유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훈의 태도는 은채뿐만 아니라 재욱도 이상하게 느꼈다. 시훈이 은채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며 분노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부드럽게 접근하는 걸까?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은채야..."
이시훈은 계속해서 은채에게 말을 걸었고, 은채는 마지못해 대답을 해야 했다.
그렇게 적극적인 한 사람과 불편해하는 다른 한 사람이 서로 어색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훈의 온화한 성격과 예의 바른 모습은 은채에게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두 사람이 사귈 때, 은채는 매우 행복했다. 시훈은 그녀의 첫사랑이었고, 그녀는 그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다. 그 꿈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사랑 같은 건 다 거짓말이었다.
이시훈이 송세희와 함께 그녀를 괴롭혔던 그때, 은채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 사람은 그녀가 진심으로 대했던 친구였고, 또 다른 사람은 그녀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했던 남자 친구였다.
이렇게 소중했던 두 사람이 함께 그녀를 상처 입혔으니,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자신은 그들에게 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녀를 떠난 것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빚을 지고 살 필요가 없게 되었고,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고 사는 굴욕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비행은 4시간이나 걸릴 예정이었고, 그들은 기내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승무원이 점심을 나눠주고 음료수를 가져다주자, 은채가 말하기도 전에 시훈이 먼저 승무원에게 말했다.
"저는 따뜻한 물로 주시고요. 이분은 음료수를 마시지 않아요."
시훈은 은채의 습관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채는 잠시 당황해 승무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승무원이 떠나자, 그녀는 우연히 재욱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은채의 심장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왜 심장이 떨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시훈의 세심한 배려 때문인지, 아니면 재욱의 차가운 눈빛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이시훈은 계속해서 다정한 행동을 이어갔다. 은채가 좋아하지 않는 채소는 자신의 접시에 옮기고, 은채가 좋아하는 음식은 자신의 그릇 안에서 골라 은채의 접시에 담았다.
"이시훈, 너 먹어. 내 접시엔 충분히 많아."
강은채는 약간 감동했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돌봄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배려를 바란다 해도, 그것을 시훈한테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은채는 본능적으로 윤재욱을 쳐다보았다.
재욱은 음식을 먹지 않고 차갑게 눈을 감고 있었다.
은채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누군가의 챙김을 바란다면, 이시훈도 아니고 윤재욱은 더더욱 아니었다. 재욱의 챙김은 따뜻함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을 얼어붙게 할 뿐이었다.
점심을 다 먹고 은채가 화장실에 간 사이, 재욱은 눈을 뜨고 차가운 눈빛을 드리웠다.
"배 비서, 강은채와 자리를 바꿔."
재욱은 명령조로 말했다. 원영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은채의 자리에 앉았다.
시훈은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다가 누군가가 다가오자,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은채가 아니라 배원영이었다.
"배 비서님, 자리를 잘못 앉으신 것 같은데요."
시훈은 원영에게 말했다.
"윤 대표님 지시 사항이에요."
원영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그때 은채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보며 당황해했다.
"강 부장님, 여기에 앉으세요.”
권혁수가 은채에게 말했다. 그가 가리킨 자리는 재욱 옆 창가 쪽의 자리였다. 이때 재욱은 원래 원영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옆자리에 자기가 앉겠다고 또 철저하게 사수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