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경비원들의 손길은 단호했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나는 권주한의 약혼녀로서 수없이 오르내렸던 그 로비를, 이제는 완전히 다른 신분으로 걸어 나왔다.
"이 건물에 다시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해." 권주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얼음처럼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권 대표님." 경비원 중 한 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권테크그룹의 유리문이 조용한 쉿 소리와 함께 닫히며 내 뒤에서 잠겼다. 그 문이 내 운명을 닫아버린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들의 운명에 종지부가 찍힌 순간이었다.
나는 몇 년 전 할아버지가 건네준 암호화된 전화기를 꺼냈다.
가슴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장혜란입니다." 두 번째 신호음이 울릴 때 익숙한 목소리가 받았다.
"저예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걸 취소해요."
"하트 그룹 계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장혜란의 목소리는 매서웠다. "확실하신가요?"
"지금 즉시 송금 취소해요." 나는 거리로 발을 옮기며 말했다. "모든 승인 철회하고, 기록도 없애요."
"알겠습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거기로 가는 중이에요."
곧 권테크그룹 임원층에는 폭풍 같은 혼란이 몰아칠 것이다.
재무이사 백준호가 한 시간 후에 잡혀 있던 송금 내역을 확인하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겠지. 마치 마법처럼 나타났던 5조 원이, 마법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을.
20분 후, 나는 키카드를 손에 쥔 채 내 아파트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카드 리더기 불빛이 빨갛게 깜빡였다.
다시 시도해봤지만 빨간불이었다.
"저… 손님." 경비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권 대표님께서 손님은 더 이상 출입 권한이 없다고…"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저 여기 살아요."
"죄송합니다만, 대표님께서 이미 이사했다고 지시하셨습니다."
로비 창문 너머로, 엘리베이터 옆에 쌓여 있는 이삿짐 박스들이 보였다.
내 박스들.
내 삶.
내 모든 것들.
"제 짐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내 목소리는 위험할 만큼 낮고 차가웠다.
"동쪽 창고로…" 그는 말끝을 흐렸다. "대표님이… 손님이 알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게 권주한의 의도였고,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다.
30분 후, 나는 포시즌스 호텔의 대리석 로비에 들어섰다.
하이힐 굽이 로비 바닥에서 또각거리며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듯 울렸다.
"프레지덴셜 스위트로 부탁드릴게요." 나는 예고 없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 방은 1박에 1,500만 원이고 현재—"
나는 검은색 카드를 대리석 카운터 위로 미끄러뜨렸다.
"지금 이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컨시어지는 카드를 읽는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태도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입니다, 손님…" 그는 카드의 이름을 확인하며 잠시 멈췄다. "한이솔… 손님.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한 시간 뒤, 나는 프레지덴셜 스위트의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내 발 아래 펼쳐진 도시는 곧 들이닥칠 전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평온했다.
휴대폰이 진동하며 장혜란의 보안 메시지가 떴다.
"송금 취소 완료. 권테크그룹 계좌는 오후 3시 47분에 동결되었습니다. 재무이사 백준호가 지난 한 시간 동안 은행에 17번 연락했습니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팀 소집 완료. 지시 기다리세요."
나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전면 신원 조사해 주세요. 권주한, 권일호 회장, 유다희. 재무 기록, 개인 이력, 숨겨진 자산, 약점. 가능한 모든 정보 다 주세요."
"일정은요?"
"어제까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노트북이 수신 파일 알림을 울렸다.
장혜란의 팀은 웬만한 국제 수사기관보다 빨리 움직였고, 그들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자원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파일을 열자마자 속이 뒤틀렸다.
유다희의 신용카드 명세서.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급 레스토랑들, 그녀와 여행한 적 없는 도시의 호텔들. 금액은 수천만 원씩. 모두 내가 급한 일 있을 때 쓰라며 보내준 돈이었다.
두 번째 파일은 더 끔찍했다. 18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메시지 대화. 유다희와 'J'라고 표시된 인물 사이의 스크린샷.
"걔는 우리가 사귀는 거 전혀 몰라."
"돈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보내주더라."
"J"의 답장은 짧았다.
"좋아. 그냥 두면 돼."
나는 그들의 비밀 관계, 그들의 계획, 내 희생으로 배불러온 그들의 흔적을 스크롤하며 손이 떨렸다.
마지막 파일은 결정타였다. 내가 그녀 어머니의 암 치료비라고 믿고 보냈던 돈. 그 모든 금액이… 권주한과 유다희 공동 투자 계좌로 곧장 들어갔다는 기록.
그들은 1년 넘게 이걸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닫고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한이솔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곧 알게 될 도시 위로, 붉게 지는 해가 번졌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권주한의 이름.
나는 그냥 음성 사서함으로 넘겼다.
하지만 다시 울렸다. 또다시. 네 번째 전화에서야 나는 받았다.
"뭘 원헤?"
"이솔아, 다행이다…" 그의 목소리는 패닉과 절박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자금에… 뭔가 실수가 있었어. 송금이 사라졌고—"
"아, 그랬어?" 나는 순진한 척 물었다.
"이걸 되돌려야 해. 오늘 일… 조금 충돌이 있었던 건 알지만, 우리 둘이면 해결할 수 있어. 회사가 필요한 건—"
"회사에 필요한 건 더 나은 리더십이야." 나는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가 볼 수 없음에도 미소를 지었다.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전화를 끊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