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오전 8시 정각, 모든 사람의 메일함에 빨간색 '긴급' 표시가 찍힌 비상 회의 공지가 떴다.
지금, 권테크그룹의 본사 회의실에 앉아 권주한이 연단 뒤에서 갇힌 짐승처럼 서성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흠잡을 데 없던 그의 정장은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했으며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러분."
권주한의 목소리가 긴장한 수군거림을 가르며 회의실을 울렸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권테크그룹은 지금 파산 직전입니다."
회의실은 곧바로 충격 섞인 속삭임과 탄식으로 들끓었다.
"협력업체들이 최종 통보를 보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일주일 안에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소송을 걸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질 겁니다."
5년 동안 사랑해온 남자가 눈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그의 꿈을 응원했고, 밤마다 찾아오는 두려움을 달래줬고, 지난 1년 동안은 그의 반지를 자랑스럽게 끼고 다녔던 바로 그 남자였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권주한이 회의실을 훑어보다가 잠시 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끝입니다."
회의가 혼란 속에 산산이 흩어지자 나는 조용히 빠져나와 텅 빈 계단통으로 향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몇 년 전 외워두었던 암호화된 번호를 눌렀다.
"할아버지?" 내 목소리는 속삭임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솔아, 우리 아가." 한준세 회장의 따뜻하지만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니?"
"도움이 필요해요."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주한 오빠 회사가 무너질 위기예요. 저는…"
"얼마나 필요하니?"
너무나 단순한 그 한마디에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5조 원… 어쩌면 더 필요할 수도 있어요."
"해결해주마."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조건은 알지?"
"완전한 익명."
익숙한 약속을 되뇌었다.
"주한 오빠도, 직원들도 몰라야 하고… 다희도 절대 알면 안 돼요."
"특히 다희는 더더욱."
그의 목소리에는 수년간 반복되어온 경고가 스며 있었다.
"네 정체는 반드시 숨겨야 한다, 이솔아. 약속해라."
"약속할게요, 할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24시간 뒤, 나는 땀으로 젖은 손바닥에 생명줄 같은 계약서를 꼭 쥐고 있었다.
권주한의 회사를 살리고, 우리의 미래를 살리고, 우리가 함께 일궈온 모든 것을 지켜낼 문서였다.
조용히 회의 테이블 위에 슬쩍 놔두거나, 모두가 떠난 뒤 그가 자연스럽게 발견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권주한의 목소리가 칼처럼 내 생각을 가르며 날아왔다.
"정이솔." 그가 내 가짜 성을 불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갑고 단단한 어조였다.
"일어서."
다리가 떨렸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우리의 진짜 문제가 뭔지 알고 싶으십니까?"
권주한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확신이 실렸다. "단순한 재정난이 아닙니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그를 바라봤다.
파일 속 계약서는 여전히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 삶을 자기 마음대로 흔들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우리가 쌓아올리는 모든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 그게 진짜 문제입니다."
그의 눈이 정면으로 나를 꿰뚫었다.
"주한 오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처럼 갈라졌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유다희가 들어왔다.
유다희—S대 시절부터 붙어 다녔고, 내가 로스쿨 다니는 동안 생활비와 월세를 내며 도와줬고, 그녀 어머니의 병원비까지 대신 내줬으며, 지난 10년 동안 조용히 커리어를 밀어준 바로 그 여자.
그녀는 소름이 돋을 만큼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권주한 옆에 섰다.
"정이솔이 다희 씨와 제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다는 얘기입니다."
권주한이 충격으로 굳어버린 회의실을 향해 선언했다.
"거짓말을 퍼뜨리며 우리를 이간질했다는 겁니다."
"그건 아니—" 내 말은 유다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괜찮아, 주한 씨." 그녀는 그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 모두가 진실을 알았으니까요."
"다희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권주한은 선언하듯 말했고,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나를 가지고 놀지도, 내 삶을 휘두르려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
내가 쥔 계약서가 파일 속에서 타오르는 듯 뜨겁게 느껴졌다.
"정이솔, 당신은 해고야." 그의 말은 실제 폭력처럼 날아와 박혔다.
"경비가 바로 밖으로 안내할 거다."
"주한 오빠, 제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애써 목소리를 낮췄다. "오해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가 날카롭게 잘라냈다. "다희가 네 진짜 모습을 다 알려줬어."
유다희의 입술은 미소를 그렸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미안해, 이솔아." 그녀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하지만 주한 씨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로 그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하잖아."
두 명의 경비원이 다가오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뚝 떨어져 자리 잡았다.
상처가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위험하고, 날카롭고,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로.
나는 계약서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이 회사도, 권주한도 살릴 수 있는 문서. 내 손에 있는 단 하나의 생명줄.
하지만 문득 깨달았다.
왜 내가? 왜 방금 50명 앞에서 날 모욕한 남자를 살려야 하지? 왜 날 쓰레기처럼 내던진 회사를 살려야 하지?
"후회하게 될 거야." 손은 떨렸지만 목소리만큼은 차분했다.
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유다희가 그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눈을 떼지 않고 속삭였다. "괜히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마."
경비원들이 나를 에워싸고 문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뒤돌아봤다.
손에 든 계약서는 더 이상 구원이 아니었다.
이제는 무기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전혀 모른다. 방금 자신들이 무엇을 내던졌는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