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그녀는 명문가의 규수였으나, 남편에 의해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람난 여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당했다. 절망 속에서, 윤채원은 그의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며 거친 강물로 몸을 던졌다. 몇 년 후, 그녀는 화려하게 돌아왔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내리쬐는 가운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과거 그 잔혹했던 눈빛이었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 "이미 없어졌어. 아들이었는데, 당신을 닮았었지." 순간, 그녀가 겪었던 모든 절망이 그 냉정했던 남자에게 돌아갔다. 한편 구석에서 작은 여자아이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는 더 이상 즐겁게 지낼 수 없는 걸까? 어른들의 세상은 참 복잡해."
제1화 선택, 절망
7월의 여성은 숨 막힐 듯 무더웠다. 뜨거운 열기가 대지를 뒤덮으며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서재 문 앞에 선 윤채원은 얼음처럼 차가워진 몸을 느꼈다. 새하얀 손바닥으로 부푼 배를 감싸 쥔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숨은 조절이 어려울 만큼 가빠졌다.
문 안에서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이 시점에서 그녀의 병세가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어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남자가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얼마나 더 채혈해야 해?”
“대략 세 번쯤요. 하지만 이제는 채혈만으로는 소용없습니다. 골수 이식이 시급합니다.”
의사 최지우도 마음이 무거웠지만, 배진욱에게 결정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술을 진행하면 아이는 절대 지킬 수 없어요.”
“억지로 지킨다 해도 약물 영향으로 기형아나 지적장애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윤채원 씨의 생명도 위험해요.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합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윤채원은 문틈 사이로 냉담한 표정의 남자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남자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더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로 짧게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이, 처리해.”
냉혹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
“수술을 서둘러 준비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채원의 시야는 흔들렸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후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갔고, ‘쿵’ 소리와 함께 문을 잠갔다. 화장실로 달려간 그녀는 잠옷을 벗어 던지며 거울 앞에 섰다. 등 뒤를 비추자, 그녀의 피부는 하얀 대신 바늘자국과 멍투성이였다.
“으흑…”
윤채원은 입을 틀어막고 참아내려 했지만, 온몸이 떨리며 눈물이 쏟아졌다. 임신 후로 그녀는 한 번도 혼자 목욕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가 직접 챙겨 주었기에 자신의 등을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최근 그의 이상한 행동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녀를 감동시킨 그의 다정함이 사실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파고들며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그녀가 밤마다 죽은듯이 깊이 잠들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가 잠든 사이 피를 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그녀의 피와 목숨이었다.
윤채원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곧 태어날 이 아이만큼은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저녁 무렵, 식탁에서.
남자는 여느 때처럼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서재에서 보였던 그 차가운 잔혹함은 감춰져 있었다. 그는 국을 떠서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몸이 약하니 이거 마셔.”
배진욱과 결혼한 지 2년. 그동안 그는 언제나 명령조였고, 그녀는 그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윤채원은 젓가락을 든 손을 멈췄다. 두 해 동안 함께했지만, 지금 그의 다정함은 오히려 독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는 분명 아이를 없애라고 했다.
갑작스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쨍그랑!
국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마치 그들의 결혼처럼.
뜨거운 국물이 튀며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더럽혔다.
배진욱은 잠시 시선을 내리더니 차가운 눈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곧 그 감정을 억누른 채 다가와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어디 아파? 최지우를 부를까?”
“내 피를 뽑으러 오라고 하게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기는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윤채원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배진욱을 향한 시선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든 듣기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옷깃이 거칠게 당겨졌다.
그가 내민 것은 설명이 아니라, 차갑고 무자비한 행동이었다.
“이미 알았군.”
귓가에 닿던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대신 위협적인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의 손에 움켜잡힌 목이 더 세게 조여졌다.
“그렇다면 네가 협조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지?”
그래. 그녀는 그의 앞에서 한 번도 선택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배씨 가문은 재벌 중의 재벌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자산을 가진 거대한 가문.
그리고 배진욱은 그 배씨 가문의 중심에 선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윤채원은 텅 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그의 눈빛에 맞서려 했지만, 눈물은 마치 줄이 끊어진 진주처럼 흐르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것은 오직 냉기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목이 잡혀 있었고, 숨을 쉴 수 있는데도 고통으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배진욱은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놓았다.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미 알았으니, 보상에 대해 생각해. 원하는 건 최대한 맞춰줄 테니까.”
그는 옷깃을 정리하며 돌아섰다.
힘없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그녀를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보상?
윤채원은 눈을 감았다. 차가운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이용당한 것일 뿐이었을까?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힘겹게 물었다.
“그 여자가 누구예요?”
그가 아내인 자신과 아이까지 버리려 하면서 지키려는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의 마음속에 그렇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걸까.
배진욱은 걸음을 멈췄다.
뜻밖의 질문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답하지 않았다.
“수술은 3일 후다. 그때까지 원하는 게 있으면 생각해 둬.”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겠다고 했다.
줄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문이 닫히는 순간, 윤채원은 텅 빈 눈으로 차가운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절망과 슬픔만이 그녀를 감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