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여기 300억 입니다
“뭐?”
성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이혼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젯밤 그녀가 자신에게 약을 쓴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는데, 아침부터 또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미쳤어?"
연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한번 흘겨보았다. 키는 분명 그보다 작았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당신도 계속 이혼하고 싶어 했잖아. 당신이 나랑 결혼한 건 할아버지 때문이었고, 이제 할아버지도 안 계시니까 더 이상 나와 묶여 있을 필요 없잖아. 신아린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 이제와서 신아린한테 명분을 주고 싶지 않다면 그건 당신 문제야."
윤성현은 입을 꾹 다물고 연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물러나겠다는 건가?
그녀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성현은 코웃음을 치며 냉담하게 말했다.
"네가 말한 거니까, 후회하지 마."연아는 조소를 지었다. 마음을 이렇게 확고하게 먹은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후회하는 유일한 건, 당신과 결혼한 거야."
그녀는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집을 나섰다. 그 뒷모습은 결연하고 단호했다.
윤성현은 연아가 떠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늘 자신 앞에서 온순하고 만만했던 그 여자가, 오늘은 뜻밖에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어젯밤 일... 정말 그녀를 오해했던 걸까?
그렇다면,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
* * *
그날 오전, 두 사람은 나란히 이혼하러 갔다.
문연아는 길가에서 산 허름한 티셔츠를 입었고, 윤성현은 프라다 최고급 블랙 슈트를 입고 있었다. 이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10분 후, 그 무거웠던 결혼 생활은 마침내 끝이 났다.
이혼 증명서를 손에 쥐고 있자니, 연아의 눈가가 따끔거렸다. 잠시 동안 아련한 감정이 스쳐갔다.
"잘 살아라."
윤성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남긴 말도, 눈길조차도 없었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깔끔하게 떠나버렸다.
"차라리 이런 게 나을지도."
연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토록 무정하다면, 앞으로 다시 마주쳐도 그저 남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생각을 접고 길을 건너려는 순간, 길고 검은 벤틀리 차량이 갑자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머리가 새하얀 중년 남자가 네 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걸어나왔다.
연아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고, 차분하게 턱을 약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온몸에서 타고난 듯한 기질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아빠를 속일 순 없네. 내가 이혼하자마자 이렇게 바로 찾아오다니."
임 집사는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깊이 허리를 숙여 연아에게 인사를 했다.
“아가씨, 회장님과의 3년 약속 기간이 이제 끝났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연아의 손에 들린 이혼 증명서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유감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보아하니, 윤성현이 아가씨를 사랑하게 만들지 못하셨군요. 이렇게 된 이상, 약속대로 아가씨께서는 S 시로 돌아가 가업을 이어받으셔야 합니연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침묵에 빠졌다.
15살이 되던 해, 그녀는 누군가의 음모로 기억을 잃고 F 시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결국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이후 윤 씨 가문의 할아버지를 만나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성인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윤성현과 억지로 그녀를 결혼시켰다.
신혼 첫날 밤, 뜻밖에도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보였던 사람은 오직 윤성현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임 집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끝내 아버지와 3년 약속을 맺었다.
지금 돌아보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위해 허비한 3년은 허무하고도 쓸모없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회장님께선 정말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제발 저와 함께 돌아가시죠. 이제는 더 이상 회장님께 화내지 마세요. 회장님께선...”
“임 집사님.”
문연아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빠 곁에는 그 여자가 있잖아요. 문 씨 집안에도 저 같은 한가한 사람이 필요할 리가 없죠. 게다가, F 시에서 해결해야 할 일도 남아있으니 돌아가지 않을래요.”
그녀의 기억을 잃게 만들고 F 시에서 떠돌게 한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 연아는 지난 2년간 조용히 그 사건을 조사했다. 그리고 자신을 해친 사람이 문 씨 집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적은 어둠 속에 있었고, 그녀는 밝은 곳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 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아버지 곁에 있는 그 여자와 다시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
임 집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회장님께선 이미 아가씨께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라며 쉽게 돌아오지 않으실 거라고 예상하셨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검정색의 골드 카드를 내밀었다.
“이건 아가씨의 카드입니다. 안에는 300억이 있고, 아가씨께서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그 말과 함께 뒤에 있던 경호원에게 손짓하자, 경호원이 신속하게 새 계약서를 연아에게 건네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