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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유산한 다음 날, 이현우는 걸그룹 출신 연습생 박혜정의 연락처를 모조리 지워 버렸다.

그는 한남동 펜트하우스에 남아 있던 그녀의 흔적을 전부 치우라고 사람을 시켰다.

마지막으로는 국가무형문화재급 장인을 불러, 찢겨 나간 우리 결혼사진을 복원해 다시 안방 침대 머리맡에 걸었다.

그는 또다시 완벽한 재벌가 후계자 남편으로 돌아왔다.

매일 그룹 회의가 끝나면 칼같이 집에 들어와, 손수 나를 위한 숙취해소국을 끓였다.

어릴 적 나를 쫓아다니던 그때처럼, 숨이 막힐 만큼 집요한 소유욕으로 다시 나를 감쌌다.

그러다 내 산전검진 예약 확인서와, 그 연습생 박혜정의 결혼식 청첩장이 동시에 그의 서재로 들어간 날, 모든 게 무너졌다.

그 결혼식은 박혜정이 빚을 갚기 위해 '넘겨진' 자리였다.

신랑은 악명 높은 사채업자였다.

이현우는 입으로는 "그런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산전검진을 가기로 약속했던 그날, 그는 혼자 스포츠카를 몰고 결혼식장으로 들이받듯 달려갔다.

수많은 재벌가 친지들과 하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는 신부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현금으로 가득 찬 서류가방을 신랑의 얼굴에 내리쳐 버렸다.

"여기 100억 원이다.

네가 떠든 빚, 열 배로 갚아 줄 테니까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그 장면이 촬영돼 SNS에 올라가자, 영상은 순식간에 퍼졌다.

사람들은 재벌 도련님에게 '약탈혼'을 당한 '도망 신부'를 부러워했고, 계급을 뛰어넘은 로맨스라며 찬양했다.

그래.

내가 이현우가 정신 차리고 돌아왔다고 믿었던 그 몇 년 동안에도, 그는 단 한 순간도 박혜정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가정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임신중절 수술을 예약했다.

친구가 그 영상을 보내 왔을 때, 나는 부엌에서 이현우를 위한 삼계탕을 끓이고 있었다.

"저거 현우 오빠 맞아?"

"무슨 일이야? 수연?"

"걔 또 그 아이돌이랑 엮인 거야?"

카카오톡 알림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구경하는 말도, 비웃는 말도, 걱정하는 말도… 별별 말이 다 있었다.

시간이 꼭 3년 전으로 되감기는 기분이었다.

이현우는 박혜정 때문에, 자기네가 운영하는 회원제 라운지에서 술에 취해 난동 부리던 이사의 아들을 계단 아래로 밀어 버렸다.

거액의 합의금을 물어 냈고, 그룹 내부 권력 다툼까지 번질 뻔했다.

똑같은 전개.

댓글창도 예상대로였다.

"헐, 저 사람 한성그룹 그 후계자 아니야? 미친 텐션이 3년 전이랑 똑같네!"

"못 가지면 뺏는다? 현실판 〈돈꽃〉이네!"

"윗댓 꿈 깨. 이건 걍 쓰레기 남자+계산 빠른 여자 조합이고… 집에 있는 본부인만 불쌍."

나는 천천히 댓글을 내리다, 불을 끄는 걸 잊었다.

냄비 속 국물이 끓어 넘치며 뜨거운 물이 손등을 적셨다.

그런데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이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성사서함.

뼛속까지 익숙한 안내음이 귀를 긁는 순간,

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마치 12월 한강 바람처럼.

분명 아침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일 처리만 끝내면 산전검진에 같이 가겠다고 했잖아.

분명 병상 앞에서, 집안 족보를 걸고 충성스러운 남편이 되겠다고 맹세했잖아.

슬프냐고? 아프냐고?

글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3년 전에 이미 다 겪었다.

나는 어지럽혀진 부엌을 담담히 정리했다.

그리고 개인 클리닉에 전화를 걸었다.

"산전검진은 취소할게요. 임신중절 수술로 예약 잡아 주세요. 가능한 한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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