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육수연을 돌보다

서혜림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냥 배은망덕한 놈이지. 아버지가 그동안 쏟은 마음이 아깝다니까."

박태현이 그녀를 나무라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해. 가영아,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서 푹 쉬어."

"네, 감사합니다, 작은 아버지."

박태현과 서혜림은 이미 쉰을 넘긴 나이에 자식도 없고, 박씨 가문에서 주식 배당금을 받으며 무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서혜림은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악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부부는 주변에서 부러워할 만큼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자, 나는 할아버지의 묘비 앞에 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떠난 이상, 나와 박건태의 인연도 끝난 것이겠지.

바람은 멈추고, 비는 그치고, 해는 저물 듯이, 나는 결국 그를 잃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조만간 다시 찾아뵐게요."

나는 묘비 앞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돌아서려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박건태가 언제 왔지?

그는 올블랙 슈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

차가운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묘비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그가 나를 데리러 온 걸까?

그가 돌아서자 나는 급히 그를 가로막았다.

"박건태, 할아버지는 이미 떠나셨어. 이제 그분을 놓아줘야 해. 당신도 알잖아, 그분이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그러나 그의 차가운 눈빛에 나는 말을 멈췄다.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걸어 나갔다.

차에 오르자, 차 안은 숨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나는 손가락을 꼬며 여러 번 입을 떼려 했지만, 그의 냉랭한 표정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육수연은 괜찮아?"

내가 그녀를 밀친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내 눈앞에서 사고를 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자 박건태는 갑자기 차를 급정거했다.

나는 앞으로 쏠렸다가 그의 손에 허리를 붙잡혀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는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바라는 게 뭐야?"

나는 몸을 움츠리며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박건태…"

"네가 정말 그 상자 하나로 이혼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 시간 만에 그 상자의 존재까지 알다니, 역시 박건태다.

"내가 밀친 게 아니야."

마음속의 씁쓸함을 눌러담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박건태, 그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나는 몰라. 그걸로 우리의 결혼을 지키려는 생각도 없어. 이혼을 원한다면, 내일 당장 구청에 가서 끝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분위기가 더 깊어졌다.

내가 갑자기 이혼을 받아들이자, 그는 잠시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수연이는 아직 병원에 누워 있어.

네가 이혼을 동의한다고 해서 그냥 떠나겠다는 거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내가 물었다.

그의 마음속에 육수연이 있는 한, 내가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내일부터 그녀를 돌봐."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건태는 운전대를 잡으며 깊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