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서 그는 평소에 이별이를 데리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강안석이 그녀를 본 건 고작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주연준이 중요한 서류를 두고 와서 그녀가 직접 챙겨 회사에 가져다준 날이었다. 그녀는 그가 업무에 차질을 빚을까 봐 서류를 건넸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무관심뿐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잠깐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조용히 돌아섰다. 겉으로 보기엔, 착하고 온순한 아내처럼 보였다.
또 한 번은, 주택현 이사장의 생신연에서였다. 그때는 주연준과 결혼한 지 2년 차. 하지만 주씨 가문의 그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그녀를 소개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날 밤, 그녀는 마치 주씨 가문이 돈 한 푼 안 주고 고용한 가정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지만 한 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했고, 오히려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결국 그녀는 구석에 조용히 웅크린 채,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비아냥거림에도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강안석이 기억하는 주연준의 아내란, 그저 순종적이고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 맞아도 반격하지 않고, 욕먹어도 입 다무는 그런 순한 양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 밤, 눈앞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당장이라도 상대를 난도질할 기세로 서 있던 이 여자는 절대로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주연준은 여전히 그녀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안석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 보려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여기 올 때 임사호 편집장을 만났어."
주연준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누구?"
"SG 주얼리 매거진의 편집장."
"어렴풋이 기억나네."
SG와 주씨 그룹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는 편집장과 몇 번 대면한 적이 있었다.
강안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사람이 그러더라. 샤인을 찾았다고. 그리고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녀가 SG의 전속 디자이너가 될 거래."
"...샤인?"
"기억 안 나?"
주연준은 별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관심 없는데?"
"하긴, 너 원래 그런 쪽엔 관심 없지. 하지만 3년 전에 우리가 에버영 디자이너 컨테스트를 후원했던 건 기억하지?"
주연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안석은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때 1등이 샤인이었어. 원래 주씨 그룹의 지원을 받아 파리에서 유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포기했지.
하지만, 나중에 그녀가 대회 관계자에게 찾아와서 부탁한 게 있었다고 하더라. 유학 지원 대신, 현금으로 받을 수 있냐고. 그 관계자가 너한테 보고했고, 당연히 너는 단칼에 거절했어.
그 이후, 샤인은 완전히 사라졌어. 더 이상 디자인도 발표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지.
그녀는 정말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디자이너였는데, 안타깝게 됐어."
주연준은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관심 없이 흘려보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더니 결국, 짧고 건조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기억 안 나."
한편, 임사호는 이별이와 배두연을 차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는 식사 자리에서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별이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져 있었다.
임사호는 그녀의 변화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임사호는 직접 묻는 대신, 배두연을 힐끗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나 배두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 어렵다는 표시를 했다.
차가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임사호가 말했다.
"이별이 씨, 당신의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협업이 되길 바랍니다."
이별이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임 편집장님. 최선을 다해볼게요."
임사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더 늦어지기 전에 들어가세요. 다음 주에 봅시다."
집에 돌아온 후, 배두연은 그녀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별이, 너 아직도 그 개자식 커플 때문에 화가 난 거야?"
이별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심코 "아?" 하고 되묻더니 몇 초 후에야 대답했다.
"아니... 그냥 작품 생각하고 있었어."
이번에 임사호가 그녀에게 준 디자인 주제는 "첫사랑".
배두연의 말에 따르면, 이건 SG 주얼리 매거진이 전속 디자이너를 영입한 후, 가장 먼저 선보이는 시리즈였다. 그 타겟층은 젊은 고객이었다.
그러니 이번 작품은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첫사랑이란 단어는 이별이에게 있어 너무도 오래전의 일이었고, 너무 희미해져서 더 이상 떠올려지지도 않았다.
주연준과의 결혼 생활 3년 동안, 그녀의 감정은 철저히 깎이고 닳아 없어졌다.
그런 감정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배두연이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근데 말이 나와서 그런데, 너 이현진이랑은 아직도 연락 안 해?"
이별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3년 전, 그녀는 에버영 디자이너 컨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파리 유학이라는 엄청난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때, 이현진은 그녀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가지 않는 거야?"
그의 눈빛 속에는 슬픔과 실망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대신, 그의 연락처를 모두 삭제했다.
그날 밤,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고 기쁨에 휩싸여 있던 순간, 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날아왔다.
그 전화는 그녀에게 차가운 현실을 선사했다.
이윤복, 그녀의 아버지가 2억 원이 넘는 빚을 졌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그녀는, 그 기쁨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생생히 들었다.
배두연은 깊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난 아직도 너랑 이현진이 그렇게 끝난 게 너무 아까워. 학교 다닐 때 너희 둘, 진짜 완벽한 커플이었잖아. 누가 봐도 서로 좋아하는 게 뻔히 보였는데, 마지막 한 마디만 못 했을 뿐이지. 솔직히 너희가 같이 파리에 갔으면 자연스럽게 연인이 될 줄 알았는데... 근데 결국 그렇게 돼버릴 줄이야. 진짜... 운명이 장난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별이는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지난 일이야."
"야야야, 그만! 우울한 얘기는 이제 접자. 맞다, 나 갑자기 서서아 관련된 웃긴 얘기 하나 떠올랐어. 알고 봤더니, 걔 처음 잡지 촬영 갔을 때 보조 조명도 뭔지 몰랐다더라? 그러다가..."
배두연은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이별이를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흥이 올라, 그 개자식 커플을 밤새 욕하며 한바탕 신나게 풀어냈다.
하지만 이별이가 침대에 누웠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서서아가 화장실에서 했던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비록 그 저급한 단어들이 주연준의 입에서 직접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그가 해왔던 행동과 완벽히 일치했다.
이별이는 자신이 주연준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그에게 완벽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의 냉담한 조롱도, 주씨 가문의 차가운 무시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이 마치 독이 묻은 칼처럼 그녀에게 무자비하게 찔러 들어올 때, 그녀는 여전히 아파했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이었다.
이별이는 이불 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반쯤 잠에 빠져들 무렵, 옛 기억들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3년 전, 그녀는 이윤복이 2억 원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녀는 사방팔방 돈을 구하려 뛰어다녔다.
심지어 대회 담당자에게 파리 유학 기회 대신 현금을 달라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단호했다.
"미안합니다, 샤인 씨. 우리 사장님께서 이런 기회는 진정한 디자이너의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대회를 사업적인 이득을 취하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집에 돌아가 울며 그 사장을 밤새 욕했다.
뭘 안다고? 누구보고 꿈이 없다고? 누구한테 감히 그런 소릴 해?
며칠 후, 이윤복은 도망쳤고, 빚쟁이들이 그녀를 찾아와 그녀에게 단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었다.
그녀의 남동생의 손을 자르거나, 아니면 그녀가 스스로 그들과 함께 떠나는 것.
이별이는 망설일 수조차 없었다.
이양이의 울부짖는 소리를 뒤로한 채,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그들은 그녀를 트와일라잇 클럽에 팔아넘겼다. 그곳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 욕망과 타락이 넘쳐나는 곳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가 마신 술에 약을 탔다.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한 채 있었다.
잠시 후, 방 문이 열리고 40~50대의 뚱뚱한 중년 남자가 들어온 순간, 그녀는 갑자기 이현진을 떠올렸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끌어내, 남자를 밀쳐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렸다.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시야가 흐려질 무렵, 어렴풋이,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앞으로 쓰러지듯 내달렸다.
그리고, 눈앞의 사람의 옷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고급스러운 원단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녀는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