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뺨을 맞다
기 상궁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 이 의원에게 빌었다. 의원은 난처하다는 듯이 초왕의 가신인 탕양(湯陽)을 바라보았다. 탕양 역시 난처해하며 말했다.
“한 번 치료라도 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 의원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치료를 해 보라고요? 곧 죽을 사람에 손을 대면 제 명성이 깎일 것입니다.”
기 상궁은 이 말을 듣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더욱 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내 불쌍한 손자야!”
녹아가 앞으로 나와 그녀를 부축하여 한 켠에 앉혔다. 가신 탕양이 의원에게 말했다.
“그럼 아이의 고통을 더는 약이라도 만들어 주게. 밖에다가는 그대를 불러 치료시켰다는 이야기는 일절 안 할 터이니.”
탕양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원의 소매에 은자를 찔러넣었다. 이 의원은 그제서야 말했다.
“고통을 덜 수 있다면야 좋지요. 그러나 고통을 더는 걸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쨌든 아이는 죽을 겁니다.”
“알겠네, 알겠네.”
탕양 역시 불쌍한 화수가 조금 더 편안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 역시 이 아이가 자라는 것을 전부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 의원이 들어가 처방을 막 쓰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화수가 있던 방의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닫히더니, 안에서 빗장을 잠그는 소리까지 들렸다. 녹아는 아까 문이 닫힐 때 얼핏 본 옷으로 문을 걸어잠근 것이 누군지를 깨닫고 놀라서 외쳤다.
“왕비입니다!”
기 상궁은 왕비가 손자가 있는 방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마치 미친 암사자처럼 달려들어 문을 두드려댔다.
“문 여십시오! 문 열어요!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
안에서 원자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크지도 않았고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딱 세 어절일 뿐이었다.
“구할 방도가 있네.”
이 의원은 비웃었다.
“숨이 얼마 붙어있지도 않은데, 구할 방도가 있으시다고요? 왕부에 무슨 신의(神醫)라도 들었답니까?”
기 상궁은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로 탕양을 바라보며 절망적으로 말했다.
“탕 대인, 부탁입니다. 문을 열라고 해 주세요. 손자 옆에는 제가 있어야 합니다.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고요!”
탕양은 왕비가 하필 이런 때에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난리를 피우려고 이러는 걸까? 아무래도 왕야가 했던 말을 왕비가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일을 왕야에게 보고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탕양은 낮은 목소리로 녹아에게 명령했다.
“녹아, 가서 왕야를 모셔와라. 왕야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왕비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다. 몇 사람을 더 불러서 문을 열어라.”
“예!”
녹아 역시 화가 잔뜩 나 있는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탕양은 정원에 놓인 돌 위에서 처방을 지어달라고 의원에게 부탁했다. 마침 처방대로 약을 가져오기도 편할 터였다.
원자윤은 바깥의 상황을 모두 듣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화수는 정신을 거의 잃어가면서도 여전히 아프다고 외치고 있었다. 상처를 보니 눈 주위에 고름이 생기고 눈 전체가 부어올라 있었다. 세균에 감염되어 있었다. 약 상자를 열어 먼저 그에게 항생제를 주사한 다음, 메스와 요오드포름을 꺼내 소독한 후 피고름을 째기 시작했다. 마취약 없이 고름을 째 내자 아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바깥에서 기 상궁이 손자의 비명을 듣고서는 악을 쓰며 문에 머리를 부딪치며 저주를 퍼부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내 손자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죽어서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
“끔찍하군.”
의원마저 비명소리를 듣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탕양 역시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픈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기 상궁이 문에 부딪혀 다칠까봐 그녀를 잡아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녹아가 초왕을 데려왔다. 초왕이 왜원 입구에 막 들어서려는 찰나에 안에서 화수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기 상궁은 초왕이 온 것을 보고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끓고 슬피 울면서 매달렸다.
“왕야! 제 손자놈을 구해주시옵소서!”
초왕은 그를 한번 훑어보고선, 얼음처럼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여봐라, 문을 열어라!”
왕부의 시위 몇 사람이 급히 앞으로 나가 문을 들이받았다. 여럿이 함께 서너 번을 들이받자 문은 곧 열렸다. 기 상궁이 쏜살같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원자윤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고, 바닥에는 온통 피범벅인 면포가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기 상궁이 달려들어 원자윤을 가로막았다.
“제가 죽는 꼴을 보려고 이러십니까!”
“할머니, 저 아파요, 아파요!”
화수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 상궁의 손을 꽉 잡고 울부짖었다.
다행히 원자윤은 이미 모든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원래는 눈의 상처 부위를 잘 싸매려고 했었는데 그것까지는 아마 못할 것 같았다.
그녀가 약 상자를 들어올리는 순간, 눈 앞에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자마자 손바닥이 날아와 그녀의 뺨을 쳤다. 귀가 윙윙거리고 뺨이 얼얼했다. 한참 후에야 격통이 몰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