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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바로 이 순간에서야 나는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약혼이 그에게는 단지 나를 협박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빅터의 눈은 악의로 가득했고, 입가의 곡선에는 약간의 자만감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내 마음은 쓰라림으로 가득했다.

라일라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빅터의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빅터, 나 때문에 엘로웬이랑 싸우지 마. 너희는 곧 결혼할 사이잖아. 나 때문에 약혼이라도 깨지면… 난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될 거야."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빅터는 곧장 그녀를 껴안고, 흐르는 눈물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가 달래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지만, 내 귀에는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약 따위 당장 깨고 너랑 함께할 수 있어."

"우리의 이별은 오해였어, 라일라. 너에게라면 만 번이고 다시 고백할 수 있어."

그래서였구나. 나에게 속삭였던 그 달콤한 말들이, 사실 이미 만 번도 더 전에 라일라에게 했던 말들이었던 것이다.

둘이 서로를 꽉 끌어안은 모습은 너무나 날카로워서, 차마 시선을 돌려도 피할 수가 없었다.

나와 빅터도 과거에는 그런 가슴 저리는 순간을 함께했었다.

사막 랠리 서킷에서 빅터의 판단 미스로 우리는 완전히 경로를 벗어났다.

차는 트랙 밖 비탈에서 전복됐고, 통신은 끊겼다.

폭발 위험이 코앞이었고, 빅터는 필사적으로 나를 화재 진압용 폼 컨테이너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는 내 몸을 감싸며 자신은 등을 불길과 고온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거대한 폭발이 터진 뒤, 그의 셔츠는 완전히 타버렸다.

나는 컨테이너에서 기어나와 곧장 빅터 품에 매달렸다.

귀를 짓누르는 이명 때문에 나는 그가 말한 단어 중 "엘(el)..."이라는 부분만 어렵게 분간할 수 있었다.

구조가 올 때까지 이어진 긴 시간 동안, 빅터의 눈물은 우리 뒤에서 치솟던 불꽃보다 더 뜨겁게 흘렀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사랑에 빠졌었다.

그리고 이제야 이해했다. 그 'el'은 나를 부르던 게 아니라, '일(ly)'였다.

아마도 그는 그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자기 내비게이터가 여전히 라일라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방금 그들의 친밀한 대화를 듣지 못한 것처럼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억지웃음을 몇 번 흘렸다.

하지만 충돌의 후유증이 몰려왔고, 이식된 칩은 통증 신호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달했다.

식은땀이 솟구치며 몸이 떨렸고, 본능적으로 빅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냉소만 흘렸다.

"뭘 그렇게 쇼를 해? 네가 통증을 못 느낀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가짜 통증을 전술처럼 쓰냐? 참 비열하기는."

라일라는 나를 힐끔 보고는 가볍게 기침만 했다.

그러자 빅터는 즉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의료팀한테 바로 데려갈게!"

그들이 떠난 뒤, 나는 탈구되고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내 손을 바라보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내 심장은 정말로 구멍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빈자리로 얼음장 같은 바람이 스며들어 뼛속까지 차갑게 얼려버렸다.

텅 빈 텐트 안은 너무 조용해서, 마치 내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나는 한때 보석처럼 애지중지하던 반지를 조용히 벗었다.

빅터가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원하는 걸 얻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방송에서는 레이스 중단이 발표됐고, 곧 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나를 집으로 데려갈 사람을 보냈다고 했다.

안내 메시지 뒤에는 10초짜리 음성 하나가 붙어 있었다.

[준비해. 너랑 결혼하러 갈 거야.]

장난스러운 이모티콘이 뒤에 따라왔다.

입가가 실룩거리더니, 조금은 감정이 가라앉았다.

간단히 짐을 챙긴 후 나는 그의 사람들이 준비한 차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몸을 던졌다.

이곳은 원래 빅터와의 결혼을 꿈꾸며 마련한 집이었다.

장식부터 가구 배치까지, 모든 것이 빅터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신혼방 모델을 그대로 따른 구조였다.

그런데 지금 눈을 돌려보니, 벽에는 라일라가 좋아하는 가수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장식은 라일라가 사랑하는 우주 테마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야 이해했다. 나는 이 집에서도, 그의 삶에서도 그저 농담 같은 존재였다는 걸.

이 집은 원래 내가 빅터에게 깜짝 선물로 준비해 준 곳이었다.

그가 감격해서 흘렸던 눈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첫사랑과의 이상적인 신혼방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 눈물의 주인공이 나였다는 착각만 빼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던 그때, 내 옆에서 휴대폰이 밝게 빛났다.

흐릿한 시야로 화면을 열어보니 모르는 번호에서 온 영상이었다.

카메라는 먼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콘돔과 란제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내 시야가 위로 이동하더니, 검은 스타킹을 신은 라일라의 긴 다리에 멈춰 섰다.

잠시 흔들린 뒤, 카메라가 뒤집히며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는 빅터의 모습이 잡혔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라일라, 제발 나랑 다시 만나줘."

"이번엔 내가 실수했어. 다음엔 더 잘 계획할게. 엘로웬이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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