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블랑슈 시점
끝이 안 보이는 병원 당직을 겨우 마치고, 토할 수도 없이 속만 지끈거리는 지독한 메스꺼움을 억지로 누르면서 나는 산부인과 동료에게 HCG 샘플을 건네 검사실로 내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결과 나오는 데 며칠 걸릴 거야. 그때 다시 와."
탈이 난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로비 쪽으로 향하던 그때, 그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세요."
알드리치의 목소리였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던 부드러운 톤이었다.
나는 차가운 타일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살짝 열린 진료실 문틈 사이로 남편,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마피아 황태자 알드리치 모레티가 의사의 말을 듣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얼굴에는 내가 거의 본 적 없던 진지한 집중이 떠 있었다.
그 톤은 원래 나를 향해야 했다. 우리를, 아직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지도 모를 새로운 생명을 향해야 했다.
그런데 그의 팔 안에 꼭 끼어 있던 여자는 라우라 로시였다.
그녀도 임신한 상태였다.
그 사실이 총알처럼 가슴을 관통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 계단 쪽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려다 차트를 잔뜩 실은 카트를 밀고 오던 간호사와 그대로 부딪혀 버렸다.
철제 카트 위에 있던 서류철이 쏟아져 나와 복도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아, 미안해요!"
얼굴이 화끈거려 나는 허둥지둥 바닥에 주저앉아 서류들을 긁어 모았고,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블랑슈?"
머리 위에서 알드리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끝이 살짝 날카로운, 긴장감이 배어 있는 톤이었다. 진료실 문가에 기대 선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져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나는 일어서면서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 HCG 수납 영수증을 움켜쥐었고, 종이는 금세 구겨져 동그래졌다.
"수술 막 끝났어. 좀 힘이 빠져서."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당 떨어져서 포도당 좀 맞으러 온 거야."
생각보다 목소리가 놀랄 만큼 안정돼 있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뒤집어져서, 약이나 좀 받으려고." 이렇게까지 침착한 톤이 나오는 게 나 자신도 놀라울 정도였다.
"블랑슈?"
이번에는 라우라가 곧바로 그의 옆으로 나왔다. 선명한 레드 컬러로 칠해진 손톱이 우아한 뱀처럼 그의 팔에 또아리를 틀었다.
"알드리치가 요즘 계속 걱정했어. 블랑슈가 너무 무리하고 건강은 안 챙기는 것 같다고." 라우라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다른 손에는 초음파 사진이 들려 있었다. 일부러 숨기려 하지도 않고 그대로 보이게 쥐고 있었다. 강한 형광등 아래에서 흐릿한 흑백의 형태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알드리치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예리하게 훑었고, 마치 거기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다. "블랑슈, 너…"
"알드리치."
라우라가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내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알드리치, 우리 약속했잖아. 나한테 분명히 약속했어."
그의 턱 근육이 굳어졌고, 옆으로 드리운 손이 서서히 주먹으로 말려 들어가면서 하얗게 질린 마디뼈가 튀어나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짜로 흔들리는 기색이 스쳤다.
라우라는 그의 위팔에 뺨을 가져다 대고 무언가를 낮게 속삭였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긴장이 빠져나갔고, 방금 전까지 있던 내적 싸움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팔이 축 떨어지면서 온 기운이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약해지는 모습을 들키기 전에, 나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의 시선이 내 등 뒤를 깊게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고,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기척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알드리치!" 라우라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며 날아왔다. 경고가 섞인 날카로운 소리였다. "나한테 약속했잖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고, 스테인리스에 비친 내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번져 있다가 문이 완전히 닫히면서 혹시 모를 그의 마지막 시선까지 잘라냈다.
1층에 내려오자 겨울밤 바람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4년.
나는 알드리치 모레티와 결혼한 지 4년째였다.
벨벳과 다이아몬드로 안감을 둘러 놓은 새장 하나, 날이 갈수록 멀어지는 남편 하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남편이 어린 시절 친구의 산전 검진에 동행했다는 구역질 나는 현실 하나를 얻었다.
4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내가 갈 곳 없는 고아가 됐을 때 모레티 가문이 나를 데려갔다.
그 후 고열로 정신을 잃고 끙끙 앓던 밤, 평소와 달리 알드리치가 내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고, 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건넨 청혼에 나는 예스를 말했다.
"나, 남편이 어떻게 되는 건지 잘 몰라." 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다봤다. "그래도 적어도 널 지키는 건 할 수 있어."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라우라 로시, 그의 어린 시절 친구가 이혼 후 이 도시로 돌아올 때까지는.
그때부터 알드리치의 회의는 눈에 띄게 늘었고, 혼자 나가는 일정도 부쩍 많아졌다.
그가 라우라에게 써 주는 시간, 함께 있는 자리와 쏟는 관심은 내가 얼마나 초라한 아내인지 정확히 재어 주는 눈금이 됐다.
직원 휴게실로 돌아와 불 꺼진 공간에 혼자 앉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 불빛이 얼어붙은 손끝을 희미하게 비췄다.
받은편지함에는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온 합격 메일이 조용히 들어와 있었다. 가을에 유럽의 어느 먼 현장으로 와 달라는 내용과 함께였다.
마감 기한: 다음 주.
나는 답장 버튼을 눌렀고,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음 주에 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