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순결을 잃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사정없이 치는 밤.
심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목적지도 없이 빗속을 헤매고 있었다.
“우리야, 이준이는 겨우 복권 5억 당첨됐다고 너랑 이혼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아내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이혼을 결심한 거라고!”
“야, 심우리! 정말 지긋지긋해. 그만 좀 하지 그래? 나 원래부터 이혼할 생각 있었어. 도대체 이혼할 거야 말 거야? 재산 분할 안 할 거야?”
심우리의 뺨 위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게 빗물인지 눈물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시야는 흐릿해졌고, 심우리는 너무 슬픈 나머지 길 건너편에서 은색 벤틀리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차가 거의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서야 비로소 알아차렸지만, 뇌가 정지한 듯 멍하니 달려오는 차를 바라만 보았다.
끼익—
은색 벤틀리는 급회전했고, 운전자의 운전 실력도 꽤 뛰어난 듯 보였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 그만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말았다.
심우리는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은색 벤틀리는 조용했다.
깊은 밤, 고요한 이곳에는 오가는 차량이 없었다.
우리는 몇 초간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캐리어를 옆에 두고 은색 벤틀리로 달려갔다.
차 속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차창에 몸을 기대어 우리는 어렴풋이 운전대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심우리는 차창을 두드리며 외쳤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상대방은 자신을 피하려다 가드레일에 부딪힌 것이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었다.
“딸깍”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얼른 차 문을 열고 몸을 구부려 차 안을 확인했다.
“괜찮으세요? 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전대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갑자기 심우리의 팔을 붙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팡!
차 문이 닫히며 굳게 잠겼다.
우리는 남자의 다리 위로 넘어졌고, 그는 뜨거운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쇠사슬처럼 가두었다.
“놓아주세요…”
위험한 느낌이 들자 심우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죽고 싶어서 그래?”
그는 그녀를 자신의 아래로 누르고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맑고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웠다.
우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가 자신이 도로 한복판에서 걷고 있었던 일을 지적한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일부러 그랬든 안 그랬든 네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날 탓 하진 마.”
말이 끝나자 남자는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심우리는 남자의 강한 기운을 느끼며 머리가 멍해졌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당신,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내가 뭘 할 것 같아?”
남자는 몸을 숙이며 차가운 입술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심우리는 머릿속이 하얘지며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키스는 처음엔 서툴렀지만 곧 능숙하게 바뀌었다.
심우리는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아픔이 엄습하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힘껏 밀쳐냈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좌석을 평평하게 만들고는 그녀를 그 위에 눕혔다. 그는 자신의 무게로 그녀를 억누르며 벗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폭우는 밤새 내렸다. 마치 이 도시의 모든 죄악을 씻어내려는 듯했다.
* * *
광란의 밤이 지나고…
차 안에 있던 남자는 손끝을 살짝 움직이며 예리한 눈을 떴다. 황보재혁은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공기 속에는 여전히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남아있는 듯했으나, 지금 그는 홀로 남겨졌다.
도망갔나?
빨갛게 물든 좌석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고, 미간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젠장…”
황보재혁은 비서 윤성에게 전화를 걸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 그리고 어젯밤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확인해서 보고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
* * *
심우리는 폭우가 내리는 깊은 밤, 허겁지겁 도망쳐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남편과 잠자리를 갖지 못했는데, 처음 본 남자와 자버리다니! 심우리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깨어나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탈출을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야.”
서혜은은 문을 열고 들어와 생강차를 건넸다.
“고마워, 엄마.”
“그래서 준이하고는 완전히 끝난 거니?”
이준의 이름이 언급되자 심우리는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든 생강차를 홀짝였다.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혼하길 잘했어. 네 아버지가 곧 새로운 결혼을 주선하려 했거든.”
서혜은의 말에 심우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물었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비록 상대가 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너도 재혼이니까 그런 걸 따질 필요 없잖니.”
“엄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서혜은은 벌떡 일어나 화가 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결혼 날짜는 한 달 뒤로 잡아놨으니,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해야 돼!”
“나 어제 이준이랑 이혼한 거 어떻게 알았어?”
심우리는 갑자기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
“사실 이 결혼은 네 동생이 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혼을 했으니 네가 대신 해야 해.”
서혜은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상대가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우리 심 씨 집안 두 딸을 모두 망칠 순 없잖아.”
심우리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꼈고, 생강차를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마, 나 엄마 친딸 맞지…?”
“네 동생 달리도 네 친동생이야. 네 동생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어?”
“그럼 나는?”
“아무튼 이 일은 그렇게 정해졌으니, 한 달 뒤 황보 집안으로 시집가는 걸로 해. 우리 심 씨 집안 두 딸을 망치는 꼴은 네 아빠도 나도 못 봐.”
* * *
결혼식 날, 동생 심달리가 그녀를 찾아왔다.
“언니, 미안해. 나 정말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그런데 엄마가…”
우리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미안? 그럼 나 대신 네가 웨딩드레스 입고 직접 결혼할래?”
“언니, 나는…”
달리는 주먹을 꼭 쥐었지만, 금세 힘이 빠져 손을 풀고 말았다.
“나한텐 남자친구가 있어. 근데 언니는 이혼했잖아…”
우리는 심달리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 나 이혼했어. 됐어, 엄마 아빠 잘 모셔. 이 일 성사시키려고 애썼잖아. 내가 동의하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이 들었으니까.”
다리가 불편한 사람과 결혼하는 건, 평생 그를 돌봐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라면, 그저 억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분명 결혼해야 할 사람은 심달리였는데… 우리는 남편의 배신을 겪은 후 친정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위로를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동생 대신 황보 집안으로 시집가는 운명뿐이었다!
상대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심달리의 인생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참 우스운 일이다! 그녀를 낳고 키워준 부모님이기에, 그녀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황보 가문의 결혼식은 번잡하고도 성대했다. 심우리는 심달리를 대신하여 시집온 것이었기에, 심 씨 부부는 그 전부터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해왔다.
비록 모두들 그녀가 누군지 몰랐지만, 우리는 마음이 허해서 결혼식 내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행히 신랑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냉랭하기만 한 그의 태도 덕에 결혼식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모든 시선은 신랑에게로만 집중되었다.
* * *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신혼 방으로 보내졌다.
나이 든 하인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사모님, 비록 저희 작은 도련님께서 다리가 불편하시지만, 황보 집안의 작은 도련님입니다. 작은 사모님께서 저희 집안으로 시집오셨으니, 앞으로 도련님을 최선을 다해 돌보셔야 합니다.”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엄마에게 동생 대신 황보 집안으로 시집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그날 밤 이후, 그녀는 고열에 시달렸다. 며칠이 지나서야 열이 내렸지만, 증상은 반복되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기 전까지도 감기약을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하인의 말을 들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제 좀 쉬어도 될까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이 든 하인은 불쾌한 눈길로 힐끗 그녀를 보고는 입으로 중얼거리며 나갔다.
하인이 나가자 심우리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그 자리에 쓰러져 바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꽤 불편하고 이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