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순결치 못한 여자
"송은하 씨? 저는 남도헌 회장님 비서입니다. 남도헌 회장님께서 초대하셨으니 저와 함께 가시죠."
김윤재를 본 송은하는 잠시 굳어있다가 금세 눈을 내리하고는 그가 알아볼가 눈에 있는 감정을 티내지 않게 숨겼다.
지난번, 박민서 때문에 다친 사람을 치료하러 갔을 때 문을 열어줬던 이 남자가 남도헌의 비서였나?
그럼 다친 사람이 남도헌이었다고?
"송은하 씨, 가시죠."
김윤재는 송은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격앙된 어조로 덧붙였다.
송은하는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저 출근해야 되는데요..."
분명한 거절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만나러 갈 생각이 없었다.
"송은하 씨, 지금 당신 신분을 잘 생각해 보세요. 남도헌 회장님을 화나게 하면 직장을 잃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의사로서의 경력 전체가 망가질 수도 있어요."
분명한 협박이었다.
송은하는 두 손을 꼭 쥐었다. 아빠는 수술비만 내주시고 엄마의 치료비와 간병비는 모두 그녀의 월급으로 충당하고 있는데... 직장을 잃을 수도,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김윤재와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병원에 전화해서 연차 낼게요."
그녀는 윗층으로 올라가 전화를 걸고 방어를 위해 서랍 속에 수술용 메스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정리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 *
송은하는 곧 유흥업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이런 곳에 가본 적이 전혀 없었다.
여기저기서 남녀들이 몸을 맞대고 있었고 구석에서는 여자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맨 윗층 VIP룸에서 남도헌과 비즈니스를 논하던 남자는 유난히 음탕하고 변태 노릇을 한다고 들었는데."
"저번에 여자 하나 죽일 뻔했던 그 사람 아니야?"
"어, 어, 그 사람 맞아."
"쯧, 이번엔 누가 재수가 없을지는 모르겠네. 어쨌든 우리만 아니면 돼. 저번에 그 여자는 목숨은 건졌지만 애를 못 갖는다고 들었거든. 무슨 수단을 써서 저렇게 고문했는지 모르겠네."
송은하는 듣는 내내 두피가 따끔거렸다. 특히 두 사람의 대화에서 남도헌의 이름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약간 황황해하며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김윤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좋은 마음으로 귀띔해 주었다.
"남도헌 회장님과 어떻게 결혼하셨는지 본인이 잘 아실거에요. 이제 이혼 서류에 서명만 하시면 오늘 이 모임은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남씨 가문이 송씨 가문에게 신세를 진 것은 사실이고 송씨 가문이 남씨 가문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송은하가 이혼에 동의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송은하는 김윤재를 바라보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절할 수 있었다면 남씨 가문의 문 앞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도헌의 강압에 굴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김윤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녀를 고급스러운 룸으로 안내했고 희미한 불 빛 속에서 소파에 앉아 있는 남도헌과 그 옆의 남자가 얼핏 보였다.
"어이."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남자의 시선을 끌었고 남자의 눈은 그녀를 위 아래로 가차 없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피부가 도자기처럼 하얀 데다 허리가 가늘고 품에 안으면 아주 부드러울 것 같은데, 나쁘진 않네."
남자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송은하는 남도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등을 기대고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얼굴 전체를 그림자에 가린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조금도 엿볼 수가 없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그녀에게 다가와 팔을 시시덕거리며 어깨에 얹었다.
그러고는 웃으며 남도헌에게 물었다.
"어디서 찾은거에요?"
“진한 메이크업 한 여자들보다 훨씬 보기 좋은데. 이런 아리따운 꽃 같은 모습이, 내 마음에 쏙 드네요!"
남도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걸 암묵적인 승인으로 봐야 할까?
송은하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손에 든 백을 움켜쥐며 소름이 돋았다.
"술 마실 수 있나?"
남자가 말하자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로 갔다.
그녀는 남자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못해요."
"못해도 괜찮아, 내가 가르쳐 주면 되는거지 뭐..."
남자는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그녀의 입 쪽으로 건넸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피하려 했지만 남자에 의해 그의 품안에 안기게 되었다. 그녀는 몸부림쳤다.
"이거 놔요..."
"이런 모임에 동행하는 것도 당신의 의무야."
남도헌의 몸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고 잘 다듬어진 실루엣은 조명 아래서 더욱 입체적으로 보였으며 그는 눈을 들어 차가운 눈 빛을 하고 말했다.
"못 하겠으면 차라리 나가!"
그녀는 남도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자신을 쓰레기처럼, 공기처럼 취급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이렇게까지 사악할 줄은 몰랐다.
"마실게요."
그녀는 남자를 밀어냈다.
남자가 건네준 술잔을 손에 쥔 그녀는 망설이다가 마침내 고개를 기울여 잔을 따라 마셨다.
그녀가 술을 마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술을 격하게 마시자 알코올이 목구멍에서 위까지 타올랐다.
톡 쏘면서도 매캐한 맛이 났다.
"남도헌 회장님, 제가 지금 데리고 가요?"
그녀의 아름다운 눈썹은 잔뜩 찌푸려졌다. 남자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송은하 심장은 격렬한 충격을 받고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고개를 드는 순간, 밤처럼 깊고 어두운 눈빛을 마주한 송은하는 움직임을 멈췄다. 바로 이 남자, 이 남자가 일부러 자신에게 치욕을 가하려는 거지?
남도헌은 이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너... 마음대로 해"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송은하를 두 팔로 감쌌다. 이번엔 그녀는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를 따라 룸에서 걸어 나왔다.
김윤재가 다가와 말했다.
"송은하 씨가 고 회장님이랑 같이가면... 아마 순결을 지키기 힘들 것 같아요..."
송은하의 어려움을 알고 적극적으로 이혼을 하라는 건데, 정말 몸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는 싶어하며 말했다.
남도헌은 스스로 와인 한 잔을 따라 한 모금에 들이키며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저 여자가 순결하다고 생각해?"
김윤재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송씨 가문은 탐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자신한테 보낸 여자가 순결치도 못하다니?
그는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송은하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었는데,
이제는 동정할 가치가 전혀 없어 보였다.
"저희가 송은하를 힘들게 하려는 의도를 알면서도 이혼을 먼저 언급하지도 않는 걸 보니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요."
김윤재가 말했다.
남씨 가문에 들어 앉으려는 건가?
"회장님..."
"가자."
남도헌은 차분한 표정을 했고 송은하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의 말을 끊었다.
김윤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앞으로 걸어가 룸 문을 열었다.
차에 앉아 있던 남도헌의 머릿속은 고지호랑 기꺼이 함께 가는 그 여자의 모습들로 가득 찼다.
저 여자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기꺼이 함께간거야?
저 여자...
"차 돌려."
김윤재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방 알아듣고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가니 사람이 없었고 이미 갔다고 한다.
남도헌은 굳은 표정으로 김윤재에게 다시 별장에 가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별장에도 역시 없었고, 송은하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가서 찾아봐 ..."
남도헌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밀려 열렸다. 이어 송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이모..."
술을 못 마시는 그녀는 한 잔을 마시고 약간 취한 상태였고 직업이 주는 침착함과 자제력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짜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 이모는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
그녀는 안에 서 있는 남자를 겨우 알아차리고 다시 한 번 외치려던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