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5년 동안 연기 했으니, 이제 그만할래
장시원의 맑은 눈동자가 멍하니 흔들렸다.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강용준의 생일이 다가오면 한두 달 전부터 선물을 정성껏 준비해 옷장 깊숙이 숨겨 두곤 했다. 그날 그에게 작은 놀라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접 다듬은 타이클립, 손바느질한 수트, 조향해 만든 향수까지.
하지만 그가 받은 건 언제나 무심한 시선뿐이었다. 한 번 보고는 곧바로 한쪽에 밀어 두기 일쑤였다.
반대로 임지수가 건넨, 두 사람 이름 이니셜이 새겨진 만년필은 늘 주머니 속에 있었고 손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5년 동안 장시원은 단 한 번도 그의 손에서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이혼을 앞두고서야 그녀를 챙기는 척하는 그 모습이, 더없이 우스웠다.
장시원은 손바닥 위 상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다섯 손가락이 살짝 말렸고, 긴 속눈썹은 나비 날개처럼 가늘게 떨렸다.
강용준은 눈을 내려 깔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스친 동요를 본 그는 얇은 입술을 조금 올렸다.
세상 여자 마음은 거기서 거기였다.
하물며 세상물정 모르는 장시원 같은 여자는 더 쉽게 흔들리고, 더 쉽게 달래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시원은 그의 앞에서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잘게 쪼갠 다이아를 이어 만든 물방울 모양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 반짝였지만, 단 한 알도 1캐럿을 넘지 않았다.
부자들의 세계에서 자잘한 다이아는 내놓기 부끄러운 싸구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더욱 아프게 한 건, 이 귀걸이가 바로 그 루비 목걸이에 딸려 있던 사은품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는 사실이었다. 그 목걸이는 강용준이 임지수에게 줬던 것이었다.
두 사람의 생일은 하루 차이였다.
임지수가 집으로 돌아온 뒤로 장시원은 단 한 번도 자기 생일을 온전히 가진 적이 없었다. 매번 임지수 생일 자리에 끼어 함께 지나갔고, 케이크와 선물은 늘 그녀 차지가 아니었다.
이 귀걸이처럼, 루비 펜던트를 빛내는 덤일 뿐이었다.
임지수는 그녀의 인생을 빼앗아 갔다. 이제 남편마저, 그녀의 존엄을 짓밟고 있었다.
"아이구, 진짜 시시하다…"
장시원은 상자를 그대로 던져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장시원! 너...!"
강용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용준 씨, 대놓고 모욕해도 되는데 굳이 남 주고 남은 사은품을 나한테 던지네. 내가 울면서 고마워해야 하니?"
장시원은 붉게 오른 그의 눈매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목소리는 싸늘하고 단단했다.
"바깥에서 그렇게 편히 바람피우고 싶으면 마음 달래는 법부터 알았어야지. 줄 거면 임지수한테 줬던 루비 목걸이를 줬어야 맞잖아."
강용준은 잠시 말을 잃고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장시원은 쾅 소리를 내며 여행가방 뚜껑을 닫았다.
"근데 줘도 안 받아. 더러우니까."
강용준의 얼굴은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낮게 울리던 목소리는 한껏 거칠어졌다.
"내가 표현을 잘못한 건지, 네가 못 알아듣는 건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말했지? 지수는 그냥 동생일 뿐이야.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어. 헛소리 계속하면 의사 붙여 줄 테니까 공연히 말 만들지 마!"
"이혼하자, 강용준."
장시원은 침대 위에 미리 올려 둔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어 조용히 내밀었다.
"그 '깨끗해' 소리. 네가 안 질려도 난 지겨워."
"너랑 임지수가 서로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지금 당장 '남매' 흉내 그만 내고, 부부로 살면 되잖아. 출장 핑계로 몰래 만날 일도 없고. 그렇게 숨죽이는 게 임지수한테 더 모욕이야."
"이혼? 네가 그걸 감히 입에 올려?"
강용준의 분노가 불붙듯 치솟았다.
아내의 눈물과 서러움엔 귀를 막은 채, 오직 '이혼'이라는 말에만 반응했다. 모욕이라도 들은 듯.
그는 한 걸음씩 다가섰다. 위압적인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미리 말해 둔다. 이혼하려면 빈손으로 나가. 내 돈은 한 푼도 못 건드려."
"나 손발 멀쩡해. 당신 돈 필요 없어."
장시원의 눈빛은 차갑고 단단했다.
"걱정 마. 내 게 아닌 건 손도 안 대."
강용준의 눈빛은 금세 사나운 기운으로 번졌다.
늘 고개 숙이던 여자가, 지금은 돌처럼 버티고 있었다.
능력도 없고 임씨 집안에서도 변두리에 몰려 있던 여자가, 뭘 믿고 이렇게 버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희준이는? 애도 버리겠다는 거야?"
강용준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아들을 들먹였다.
"양육권,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이겨서가 아니라, 안 하려고."
장시원의 눈빛은 파문 하나 일지 않았다.
"희준이는 당신한테 줄게."
강용준의 눈이 번쩍 좁혀졌다.
그녀가 예전에 그랬던가. 병원에서 아이가 위급할 때 밤새 곁을 지키고, 해마다 고기를 끊고, 절마다 찾아가 아이의 무사만 빌던 그 사람이었는데.
아들이 전부였던 그녀가, 아이를 버리겠다고?
강용준의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내가 널 높게 쳐 준 게 잘못이었지. 네 아버지 말이 맞았어. 넌 자기밖에 모르는, 차갑고 무정한 여자야. 희준이를 그토록 사랑한다더니, 결국 날 속이려고 연기한 거였어?"
장시원은 코웃음을 흘렸다. 가슴끝이 콕 찌르듯 아려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늘 그녀를 깎아내려 임지수의 빛을 더 키웠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순간, 그녀에게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용준과는 5년을 부부로 살았다.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고, 그의 아이를 낳았고, 집안 살림을 지켰다.
남들이야 몰라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달라야 했다. 어떻게 그녀의 노력과 희생을 이렇게 쉽게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연기? 그래. 5년 동안 했고, 이제 그만할래."
장시원은 한때 그토록 빠져들었던 그의 차갑고 매혹적인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5년 동안 묻어 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지금 와서 후회되지? 그때 임지수를 골랐다면 더 나았겠지? 그 애는 착하고 순했잖아. 난 이제 당신 아내도, 강희준 엄마도 하고 싶지 않아."
짧은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금 보니, 그때 지수를 선택했으면 확실히 나았지. 적어도 너처럼 대꾸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강용준의 입술에 비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지수는 절대 '아들 안 키우겠다' 같은 말은 안 하지. 정상적인 여자라면 그런 말은 절대 못 해. 네가 그렇게 독하고 차가우니 아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 거고, 내가 널 대하는 태도도 뻔하지. 내가 미쳤었지. 그때 너랑 결혼한 게."
장시원은 다시 웃었다. 이번엔 쓴맛이 도는 미소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래? 그럼 강 대표, 이제 제정신 차려. 이혼 합의서야. 빨리 서명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