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유산, 남편과 아들의 선택
"유산 조짐입니다. 아이는 지켜내지 못했어요."
의사의 짧은 말과 함께 무거운 한숨이 병실에 번졌다.
장시원은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가슴이 비틀리듯 아파 와 숨이 막혔다.
두 시간 전.
강씨 그룹 산하 차세대 에너지 연구실에서 전기 화재가 났다. 장시원은 새로 개발한 칩을 지키려고 주저 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칩은 무사히 살려냈지만, 짙은 연기를 들이마신 장시원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응급실로 실려 왔을 때 장시원의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하반신에서는 피가 흘렀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제야 장시원은 이미 두 달 가까이 아이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젊으시잖아요. 아이는 또 생길 거예요."
의사는 달래듯 말하며 장시원의 몸을 닦아 주었다.
"지금은 몸이 많이 약해졌으니 입원해서 경과를 보셔야 해요. 남편분께 연락해서 곁을 지키게 하세요."
장시원의 몸이 떨렸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지만, 강용준에게 전화를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틀 전, 강용준은 M국으로 프로젝트 미팅을 간다고 했고 아들 강희준은 해외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며 따라갔다. 장시원은 잘 알고 있었다. 강용준은 외부 일에 몰두할 때 방해받는 걸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복동생 임지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장시원은 떨리는 손끝으로 화면을 열었다. 순간 숨이 막혔다.
사진 속에서 임지수는 강희준을 끌어안고 하트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강용준이 앉아 있었다. 결혼사진조차 피하던 강용준이, 이번에는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옅게 입꼬리를 올린 보기 드문 미소였다.
사진 속 세 사람은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다.
[언니, 나 용준 오빠랑 희준이랑 뮤지컬 보고 있어. ‹나이팅게일의 노래› 알지?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 맞지? 내가 먼저 봤네~]
‹나이팅게일의 노래›. 매 회 매진이라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장시원은 몇 번이나 강용준에게 함께 가자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한마디뿐이었다.
"바빠서 못 가. 희준이는 아직 어려. 나중에 보자."
그제야 알았다. 바빠서가 아니었다. 강용준은 장시원과 함께하기 싫었던 것이다.
장시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미 갈라진 마음이 다시 칼끝에 찔린 듯했다.
병실로 돌아온 장시원은 배를 움켜쥐고 통증을 버텼다. 끝내 강용준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 신호가 울린 뒤,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용준 씨, 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있어. 혹시 조금 일찍 돌아올 수 있어?"
장시원의 얼굴은 창백했고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냉담했다.
"여기 일 아직 안 끝났어. 이틀은 더 있어야 돼. 남 집사 보낼게."
장시원은 휴대폰을 더 세게 쥐었다.
"당신, 지금... 지수랑 같이 있는 거야?"
"시원아, 그게 무슨 뜻이야?"
강용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5년 동안 수도 없이 말했잖아. 난 지수를 동생으로만 봐. 그만 좀 해. 아프다 그러면서 또 트집이야? 정말이지..."
그때 강희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빠, 전화 소리 너무 커요. 저랑 이모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
이어진 말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엄마는 신경 쓰지 마요. 왜 그렇게 귀찮게 구는 거예요!"
장시원이 부르기도 전에 통화는 끊겼다.
텅 빈 병실. 장시원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사지로 냉기가 엄습했다.
……
사흘 뒤, 장시원은 조기 퇴원을 택했다. 연구소에는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여전히 많았고, 이번 신제품 발표는 강용준이 크게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해 질 무렵, 탈진한 몸을 이끌고 파정원에 들어섰을 때 장시원은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현관을 막 지나는데, 집 안에서 강희준과 임지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시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화분 뒤로 몸을 숨기고 거실을 엿보았다.
소파에는 임지수가 강용준과 강희준 사이에 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생일 케이크가 놓여 있었고, 임지수의 목에는 세계적 명품 브랜드의 한정판 루비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지난달 매장 진열대에서 우연히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목걸이였다.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 감히 바라보지도 못했던 그것이, 지금은 임지수의 목에 걸려 있었다.
"오빠, 선물 고마워. 진짜 마음에 들어."
임지수는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강용준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촉촉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거 엄청 비싸지? 앞으로는 나한테 이렇게 쓰지 마. 난 선물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 했잖아."
강용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돈은 중요하지 않아. 네가 좋아하면 됐어."
"이모, 눈 감아 봐요!"
강희준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임지수는 곧장 눈을 감았다.
곧 강희준이 알록달록한 크리스털 팔찌를 임지수의 손목에 끼워 주었다.
"됐어요!"
"어머, 너무 예쁘다!" 임지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고마워, 희준아. 평생 간직할게. 꼭 소중히 할 거야."
임지수가 몸을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강희준이 먼저 얼굴을 들어 임지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강용준을 빼닮아 언제나 차갑던 강희준이, 장시원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애정을 임지수에게는 너무 쉽게 내주고 있었다.
장시원의 심장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의 입안 가득 쓴맛이 번졌다.
"이모, 아픈 몸은 저랑 아빠가 꼭 지켜 드릴 거예요."
"고마워, 우리 희준이."
임지수는 얼굴을 붉히며 옆의 강용준을 흘끗 바라보았다.
강용준은 미소를 띠고 케이크를 잘라 임지수에게 건넸다.
그 장면이, 장시원의 창백한 얼굴에서 마지막 핏기마저 지워 버렸다.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남자가 다른 여자의 생일을 챙기고, 목숨 걸고 낳은 아들이 그 여자를 지켜 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장시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입가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장시원은 등을 돌렸다. 이제 이 결혼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오기로 결심했다.
집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젖어 가는 빗속에서 장시원은 오래 묵혀 둔 번호를 눌렀다. 곧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정말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장시원은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단호했다.
"잘 지냈어. 그런데, 나 이혼하려고."
"뭐라고?!"
"이혼 서류 좀 써 줘. 최대한 빨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