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한국어
챕터
설정

제3화

북촌 성북동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로 돌아오자마자 차준호는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고, 약 상자를 꺼내 위장약을 찾아 건네주더니 앞치마까지 둘러매고 주방으로 들어가 그녀를 위해 속을 달래는 죽을 끓였다.

한재희는 소파에 몸을 기대 앉아 그런 그의 바쁜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잠겼다.

차준호는 원래 외출할 때마다 수행 비서와 전담 셰프가 따라붙던 재벌가 후계자였지만 그녀와 함께한 뒤로는 기꺼이 요리를 배우고 집안일을 도맡으며 주변 사람들 눈에는 믿기 힘든 '아내 바보'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청력을 잃은 뒤에는 아무 말 없이 수어까지 익혔다.

친구들에게 "완전히 잡혀 사네"라는 놀림을 받아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고, 한재희가 위장병을 앓기 시작한 뒤에는 하루 세 끼를 직접 챙기겠다며 위에 좋은 식단을 연구해 가며 정성을 쏟았다.

한때 그는 분명 그녀를 세상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고 뼛속까지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깊은 애정의 뒤편에 가장 추하고 비열한 배신이 숨어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한재희의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 욱신거렸고, 그의 사랑이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죽을 겨우 비운 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 여덟 시가 가까워져 있었고, 차준호는 줄곧 침대 옆을 지키고 있다가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물을 건네 직접 마시게 해 주었다.

그가 막 수어로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연달아 진동하기 시작했고, 화면이 켜지자 그는 힐끗 보기만 하고 급히 꺼 버렸지만 한재희는 그 짧은 찰나에 익숙한 프로필 사진을 똑똑히 보았다.

김서연이었다.

차준호는 창가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고 등을 돌린 채 목소리를 낮게 깔았지만 말끝에는 묘한 들뜸이 묻어 있었다.

"응... 알아... 여기 일 끝나면 바로 갈게. 혼자 먼저 좀 놀고 있어."

방금까지의 다정한 간호가 순식간에 가장 잔인한 고문처럼 느껴졌다.

한재희는 눈을 감은 채 피곤한 척 숨을 고르게 했다.

전화를 끊고 돌아온 그는 침대 곁에 앉아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수어를 이어 갔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푹 쉬고 있어. 최대한 빨리 올게."

눈빛은 여전히 걱정으로 가득했고, 마치 방금 통화가 평범한 업무 연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했다.

한재희의 마음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조금만 아파도 수억 원짜리 회의를 미련 없이 취소하고 곁을 지키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여자를 위해 그녀를 혼자 두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속으로 차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접어야 할 때였다.

차준호가 집을 나간 것을 확인한 뒤 한재희는 몸을 일으켜 평소 거의 쓰지 않던 다른 휴대전화를 꺼냈고 오래전에 저장해 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린 시절 함께 자랐던 이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랜만이야…"

짧은 통화를 마친 뒤 그녀는 태블릿을 켜고 뉴욕의 생활 환경과 주택 매물 정보를 차분히 검색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자료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차준호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그녀가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기에 한재희는 의아한 마음으로 통화를 받았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김서연의 끈적하고 요염한 숨소리가 먼저 귀를 파고들었다.

"부회장님… 음… 말해 봐요. 저랑… 집에 있는 그 귀 안 들리는 인형 중에 누가 더 좋아요?"

이어 차준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섞였고 둔탁한 소리까지 함께 들려왔다.

"당연히 너지… 걔는… 너무 재미없어."

"역시… 나만 있어야 이렇게 즐겁지… 아… 살살…"

잠시 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거칠게 튀어 올랐다.

"야, 내 폰 왜 만져… 잠깐, 이 번호… 재희 번호 아니야?!"

김서연은 태연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뭐 어때요… 어차피 못 듣는데… 이게 더 짜릿하잖아요."

통화는 거칠게 끊겼다.

한재희는 휴대전화를 움켜쥔 채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실내는 따뜻했지만 발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온몸을 얼려 버리는 듯했고, 자신의 장애가 그들의 불륜 놀이에 양념처럼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막히고도 처참했다.

차준호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입맞춤을 하려 했다.

한재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어 피했고, 그 입술이 어젯밤 어디에 닿았을지 생각하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수어로 물었다.

"왜 그래?"

한재희는 코를 살짝 찡그리며 손을 움직였다.

"옷 안 갈아입었잖아. 냄새 나."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수어로 설명을 이어 갔다.

"어젯밤 접대가 너무 늦게 끝나서 술도 많이 마셨고 그냥 사무실에서 잠깐 잤어. 아마 실수로 네 번호로 전화가 걸렸나 봐. 시끄럽진 않았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한재희는 그냥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주었다.

식탁 위에는 그가 성남의 유명한 노포에서 사 왔다며 자랑스럽게 꺼낸 김밥이 놓여 있었고, 예전 같았으면 가장 먼저 손이 갔을 음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 가게는 회사와는 정반대 방향에 있었고, 대신 김서연의 고급 아파트와 가까웠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거 싫어? 그럼 뭐 먹고 싶어? 내가 바로 만들어 줄게."

그는 또다시 수어로 걱정스럽게 묻고는 우유를 데우러 주방으로 향했다.

"괜찮아."

한재희는 담담하게 거절한 뒤 그림 도구를 챙겨 들었다.

"입맛 없어. 작업실 갈게."

이 거짓된 공기로 가득 찬 공간에서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한재희는 원래 만화를 좋아했고 졸업 후 개인 작업실까지 마련해 연재를 이어 오고 있었으며, 마지막 작품만 마무리하면 업계를 정리할 생각이었기에 이제는 이 공간도 처분해야 했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성북동 작업실 양도하려고 합니다. 이번 달 안에 정리하고 싶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업실 문이 벌컥 열렸다.

차준호가 급한 얼굴로 서 있었고, 손에는 그녀가 한때 가장 좋아하던 디저트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다급하게 수어를 쏟아 냈다.

"양도? 왜 양도해? 여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작업실이잖아. 무슨 일 있어?"

지금 앱을 다운로드하여 보상 수령하세요.
QR코드를 스캔하여 Hinovel 앱을 다운로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