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청력이 돌아온 순간, 한재희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이 비밀을 가장 소중한 선물처럼 간직해 약혼자 차준호에게 전해 주는 일이었다.
그녀는 예약조차 하지 않은 채 곧장 JK그룹 본사 빌딩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늘 부드러움으로 가득하던 그의 눈동자가 어떤 빛으로 반짝일지, 한재희는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그려 보고 있었다.
오늘 밤 축하할 레스토랑도 이미 정해 두었는데, 서울의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클라우드"였다.
그러나 부회장실 문 앞에 섰을 때, 안쪽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지나치게 요염해 듣기조차 불쾌한 여자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JK그룹의 수석 비서 김서연이었다.
"부회장님… 약혼자분은 어차피 못 듣잖아요."
끈적하게 달라붙는 애교가 말끝마다 묻어 있었다.
"오늘 비즈니스 리셉션 끝나고요… 제가 옆에 있어 드리면 안 돼요? 괜찮은… '호텔'도 알고 있는데요."
그 순간, 한재희의 온몸을 흐르던 피가 단숨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막 되살아난 청각이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던져진 듯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곧이어 차준호의 목소리가 느슨하고 나른한 웃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후… 그렇게 급해?"
부정도, 제지도 없었다.
그 안에는 묵인에 가까운 애매한 온기만 남아 있었다.
"쿵—"
마음속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이어 동료들의 가벼운 웃음과 아부 섞인 말들이 뒤따랐다.
"역시 부회장님이십니다. 집에 하나, 밖에 하나, 완벽하시네요."
차준호는 그런 말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낮게 웃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문 쪽으로 향한 그의 시선이, 초점을 잃은 채 서 있던 한재희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떠 있던 웃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지만, 이내 그녀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듯 표정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차준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와 안쪽을 몸으로 가렸다.
"재희?"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어를 시작하며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혼자 왔어? 퇴근하고 내가 데리러 가서 웨딩드레스 피팅하기로 했잖아."
"메시지도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지나치게도 진지한 얼굴이었고, 그 진심 어린 표정이 오히려 한재희의 눈을 따갑게 찔렀다.
열여덟 살이던 해, 차준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마음을 열기까지 그는 꼬박 2년의 시간과 셀 수 없는 로맨스를 쏟아부었다.
장미꽃과 다이아몬드, 명품 가방까지,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그녀를 상류 사회가 부러워할 만큼의 공주로 만들어 주었다.
3년 전의 교통사고에서는 그녀가 그를 대신해 가장 치명적인 충격을 온몸으로 막아냈고, 그 대가로 영원히 청력을 잃었다.
세상이 소리 없는 공간으로 변한 뒤, 한재희는 여러 차례 이별을 꺼내 들며 자신이 그의 짐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하던 차준호는 붉어진 눈으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수어를 배웠고, 한재희가 무너져 울던 수많은 밤마다 그녀를 끌어안은 채 손으로 같은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네가 평생 못 듣는다고 해도, 난 너야."
차씨 가문 전체가 '장애인'과의 결혼을 반대했을 때조차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재 앞에서 사흘 밤낮을 무릎 꿇고 버텼고, 폭우에 온몸이 젖어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소리쳤다.
"한재희랑 결혼 못 하면, 난 이 집안을 떠나겠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혼을 허락했다.
프로포즈 날, 차준호는 제주도의 한 프라이빗 에스테이트를 통째로 빌렸다.
입구부터 예식장까지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연분홍색 장미로 길을 가득 채웠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무릎을 꿇던 그의 손은 떨려서 케이스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고, 아이처럼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머금고 "응"이라고 답하자 그는 기쁨에 차 그녀를 안아 올려 제자리에서 몇 번이고 돌았고, 웃음소리는 하늘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어제, 뜻밖의 충돌로 머리를 부딪친 사고가 있었고, 그 일로 잠들어 있던 청각이 기적처럼 깨어났다.
한재희는 그것이 하늘이 내려준, 그들의 사랑을 위한 마지막 축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 되찾은 이 청각이 그녀에게 건네준 첫 번째 선물은, 약혼자의 너무도 추악한 배신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반복되던 잦은 "심야 회의"와 낯선 향수 냄새가 배어 있던 포옹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의 다정함과 온기는 이미 다른 여자에게 남김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재희는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며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그러다 천천히, 한 손가락씩 힘을 풀었다.
눈앞에서 여전히 "걱정하는 척" 수어를 이어 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이 남자가 이렇게 낯설고 우스꽝스러워 보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는 여전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웨딩드레스 빨리 입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가자. 지금 바로 데려다줄게."
결혼식은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재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결혼식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바람을 피운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이 남자를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