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제수 씨랑 이제 결혼도 했잖아
서울시 금융구역, 희성 그룹 본사 꼭대기 층.
고지혁은 사무실에서 키보드 위를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 속 그래프와 숫자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띵동.”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고, 고지혁은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양우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고 대표님, 임택환 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곧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핑크색 셔츠를 입은 잘생긴 남자가 경쾌하게 들어왔다.
“고지혁, 아직도 일 중이야?”
그는 고지혁을 보자마자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까지 했는데, 비록 결혼식은 생략한다 치더라도, 신혼여행 정도는 갔어야지!”
고지혁은 여전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그럴 시간 없어.”
임택환은 고지혁의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그의 차가운 태도에 개의치 않고 장난스럽게 눈을 좁혔다.
“제수 씨가 정말 불쌍하네. 이런 재미없는 남자랑 결혼하다니.”
그제야 고지혁은 그를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임택환,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임택환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심심해서 제수 씨를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만둬.”
고지혁은 단호히 거절했다.
“너도 내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를 알지 않나.”
“물론 알지.”
임택환은 미소를 지우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가정을 이뤘으니, 과거의 일은 잊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의 말이 끝나자, 고지혁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의 손은 알 수 없게 약간 힘이 들어갔다.
“잊을 일이 아니다.”
잠시 침묵한 후, 고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임택환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 그 여자아이는? 그녀의 행방은 찾았어?”
“일부 단서를 발견했어.”
고지혁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거 참 다행이네.”
임택환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난 네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으려는지 항상 궁금했거든. 솔직히 네가 직접 몸으로 보답하는 건가 기대했었는데, 결국 너 자신을 팔아버릴 줄은 몰랐네.”
임택환의 가벼운 농담에 고지혁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임택환은 분위기가 싸해진 것을 느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고지혁의 휠체어 쪽으로 가면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저기… 고지혁, 제수 씨 한테 네 다리 상태를 말했어?”
고지혁은 원래 재무부에서 올린 보고서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아니.”
잠시 후, 고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택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형에게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제수 씨랑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 그런데 계속 숨길 생각이야? 혹시…”
말을 멈춘 임택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혹시 이제 제수 씨를 받아들여보는 건 어때? 너도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만 살 수는 없잖아.”
그는 고지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기 위해 결혼했다고 했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함께 사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고지혁은 침묵한 채 임택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보고서를 빠르게 검토한 뒤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과거는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임택환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는 고지혁의 냉정한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10년 전의 그 사고는 모두에게 악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고로 인해 고지혁이 다리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고지혁이 잃은 것은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