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뜻밖의 일
병원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는 강은채의 얼굴은 처참하고 비통했다.
아버지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어머니는 전신의 장기가 손상되어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비록 여동생은 중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유혈이 낭자한 장면에 놀라 기절한 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교통사고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있으며, 상대측의 사망한 운전자와 부상자 한 명에 대한 보상은 강은채 혼자 모두 감당해야 했다.
이 갑작스러운 충격은 강은채의 몸과 마음을 무너지게 하기에 충분했으나, 최악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파산하고 거액의 빚까지 남겼다. 빚쟁이들은 병원을 찾아왔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강은채를 가만두지 않았다.
강은채가 망연자실해 멍하니 있는데, 간호사가 다가왔다.
“강은채 보호자분, 어머니와 여동생의 입원비를 빨리 수납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도 치료를 계속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방법을 한 번 생각해 볼게요.”
이제 병원비만으로도 강은채는 무능력해졌지만, 사상자에 대한 배상금과 아버지가 남기고 간 거액의 빚은 그녀의 목숨을 팔아도 어림없는 액수였다.
그러나 설령 무능력하더라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현재 아무도 그녀를 돕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시훈이었다.
“시훈 씨……”
전화기를 들고 그저 남자 친구의 이름만 부를 뿐, 그 다음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일이야?”
이시훈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 어머니가 아프셔서 지금 급하게 돈이 좀 필요해. 나……”
강은채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자존심을 완전히 버린 채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기 건너편에서 이시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 너 지금 나한테 돈 빌리는 거지? 아니면 나한테서 돈을 좀 갈취하려는 건가?”
“갈취? 시훈 씨, 그게 무슨 말이야?”
이시훈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강은채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시훈이 그녀를 사기꾼 취급하는 걸까?
“너 아직도 속이려 해? 이미 네 본모습이 드러났는데도 나한테 연기를 하다니, 강은채 너 정말 뻔뻔하구나. 어머니를 핑계로 돈을 갈취하려고 하다니.”
“나…… 시훈 씨, 나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연기'라는 두 글자가 나오기도 전에 또다시 그에 의해 말이 끊겼다.
“강은채, 너 아직도 염치없이 부탁할 게 있어? 아니면 이번엔 누구를 팔려고? 내가 똑똑히 말하는데, 나는 네 집안이 망해도 너한테 한 푼도 안 줄 거야.”
이시훈이 극도로 분노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의 분노에 강은채는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이시훈은 이미 그녀의 집안 상황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였으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마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안달 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녀의 상황은 그녀의 오만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시훈이 어떻든 간에, 강은채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나는……”
그러나 그녀가 자존심을 내다 버리고 말문을 연 그때, 전화기 너머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욕조 물 다 받아놨어. 안 씻으면 물 다 식어.”
“서둘러, 욕실에서 기다릴게.”
애교 섞인 목소리는 사람을 녹일 듯했으나, 강은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목소리……
“이시훈, 너희들……”
“들었으면 됐어. 내가 지금 똑똑히 말해줄게. 나를 속였다고 우쭐하지 마. 나도 너한테 진심 아니니까.”
이시훈의 한마디가 뼛속까지 얼어붙게 했고, 강은채를 지옥으로 내몰았다.
“시훈 씨가 말한 그거, 그 여자가 알려 준 거야?”
“맞아, 그녀가 알려줬어.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녀를 협박하려고? 강은채, 내가 경고하는데, 그 여자는 지금 내 여자니까, 내가 있는 한 털끝 하나도 건들 생각하지 마.”
분노의 경고 후,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 사람이 정말 그녀가 사랑했던 그 남자인가?
분노, 억울함, 그리고 절망적인 서러움이 그녀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VIP 병실에서 사흘간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윤재욱이 마침내 의식을 회복했다.
머리에 두른 거즈, 얼굴에 난 미세한 찰과상, 그리고 두통으로 찌푸려진 미간까지 그의 강인한 외모를 감출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픈데.”
윤재욱이 욕을 하며 앉자, 윤재욱의 누나 윤재희가 얼른 침대로 와 쳐다보며 말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 드디어 일어났구나.”
“……”
“네 운전기사님 죽었어.”
“이런 젠장, 가해자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윤재욱이 눈썹을 찡그렸다.
“재욱아, 가해자도 죽었어, 그리고 가해자가 강군이야.”
“강군?”
윤재욱은 가해자가 왜 강군인지 의아했다. 강군이 고의로 사고를 낸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맞아, 강군이야. 강군 차에는 아내랑 아이도 있었어. 네가 사고를 당한 위치는 공항 고속도로야. 강군이 빚쟁이를 피하려고 급하게 운전했나 봐. 경찰이 차가 과속하면서 강군이 조작 실수로 차량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고, 그 상태로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를 뚫고 너를 박은거 같대.”
윤재희는 경찰의 초기 조사 결과를 윤재욱에게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
윤재욱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윤재희의 말에 따르면, 이 비극은 어쩌면 뜻밖일 수도 있었다. 아니, 설령 우연이라고 해도, 설령 강군이 죽었다고 해도, 그는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강씨 집안에 대한 원한은 평생 풀리지 않을 것이다.
“강군 아내랑 아이는 어때?”
윤재욱이 나지막이 물었다.
“강군의 아내는 중상이고, 아직 위중한 상태래. 의사가 말하길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대. 작은 딸은 큰 충격에 놀라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고 했어. 큰딸이 해외에서 돌아와서 이 일을 해결하고 있어.”
윤재희가 덧붙였다. “네가 의식을 잃은 며칠 동안, 둘째 삼촌이 다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어. 할아버지는 네가 깨어나자마자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라고 엄명을 내리셨어. 네가 안정적인 가정을 가져야 할아버지가 당당하게 회사의 실권자 자리를 너한테 넘겨줄 수 있대.”
“둘째 삼촌이 이렇게 조급할 줄이야.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치 않은데 벌써 참지 못하다니. 좋아, 그럼 내가 그의 희망을 완전히 짓밟아주지.”
윤재욱이 차갑게 말했다. “상속자가 필요하다는 거지? 할아버지가 원하신다면, 내가 해드리면 그만이지.”
날이 어두워진 후 윤재희가 떠났고, 윤재욱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병원 공원을 지날 때,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강은채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마주할 수 없었고, 이시훈의 배신은 더욱 참을 수 없어 병원 공원에서 혼자 울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왜..."
강은채도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몰랐다. 단지 이 모든 것이 너무 불공평했고, 그녀를 분노하게 하며 더 억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그 누구도 그녀를 돕기를 원치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하늘도 무심한 듯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흐르는 빗물은 눈물을 감췄고, 눈물은 빗물과 섞였다.
그렇게 폭우 속에서 처절하게 울고 있는 여자를 보며 윤재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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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두운 방 안은 사람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불안한 것은 그녀의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다.
잠시 후 방 안으로 들어올 남자가 어떤 모습인지 그녀는 전혀 몰랐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려 했다. 이는 설령 이시훈이 그녀를 찾아와도 그들 사이에는 이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의 시간도 잠시, 어두운 침실의 문이 열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강은채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현실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해야만 했다. 어디 마음대로 도망칠 자격이 있겠는가?
남자는 재빨리 방문을 닫고, 익숙한 듯 침대로 다가갔다. 여자가 그곳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